2009. 4. 10. 14:04ㆍReview
그 어둠을 명명백백 밝히는 여행
- 극단 작은신화 「로베르토 쥬코」
- 김해진
- 조회수 466 / 2008.06.19
2008년 100페스티벌 참가작 _ 극단 작은신화 <로베르토 쥬코>
지난 5월 20일부터 시작된 ‘100페스티벌’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80여 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연극의 미래를 꿈꾸며 시작된 이번 축제는 우석레퍼토리극장, 블랙박스씨어터, 성동소월아트홀에서 총 12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축제의 막바지, 극단 작은신화의 <로베르토 쥬코>를 보며 그간의 참가작들을 챙겨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100페스티벌을 주최한 100만원 연극공동체는 상업적 흥행을 위한 연극제작시스템에서 벗어나 연극정신에 대해 고민하고 새로운 관객들을 창출하기 위해 저예산, 독립, 연극공동체운동의 일환으로 지난 2005년 발족했다. 2006년 10주간 진행된 5W페스티벌에 이어 2007년에는 4주 동안 ‘소극장 네트워크 페스티벌’을 열고 총 11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연극제작현실을 인지하고 작품 발굴 및 소극장 연대, 연극공동체 만들기를 도모하는 반가운 움직임이다.
극단 작은신화는 <로베르토 쥬코>로 100페스티벌에 참여했다. 베르나르-마리 콜테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로베르토 쥬코 Roberto Zucco」(1990)는 실제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쓰여졌는데, 인위적이고 시적인 대사, 여럿으로 나뉘어진 장면 구성, 독백의 다양한 극적 기능 등으로 알려져있다. 콜테스는 이밖에도 「서쪽 부두 Quai ouest」(1985), 「목화밭에서의 고독 Dans la solitude des champs de coton」(1986), 「사막으로의 회귀 Le retour au désert」(1988), 「흑인과 개들의 격투 Combat de nègre et de chiens」(1989) 등의 작품들을 남겼다.
작품 속 여러 장소는 칠판이 덧대어진 탁상을 이리저리 움직여 표현한다.
어둠 속에서 객석을 비추는 손전등 두 개. 공연 <로베르토 쥬코>는 그렇게 시작한다. 교도관들의 감시망을 뚫고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집을 찾은 탈주범 쥬코. 애초 아버지를 살해했던 그는 작업복을 찾으러왔다며 서늘한 눈초리로 문을 두드린다. 그의 어머니는 겁에 질린 채 집 안에서 웅크린다. 공연 안에서 집을 비롯한 여러 장소는 칠판이 덧대어진 탁상을 이리저리 움직여 표현한다. 쥬코는 지붕이라도 떼버리듯 탁상하나를 치우고 어머니를 목졸라 살해한다. 무대 오른쪽에 세워진 탁상에는 ‘어머니 살해’라고 분필로 적혀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한 가정.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어머니는 맞고 오빠는 심하게 꼬여있고 언니는 동생에게 집착한다. 20세기 말의 무미건조하고 폭력적인 기운으로 얼룩진 이 가정에서 막내는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로 포주에게 넘겨진다. “병아리야.”라고 호명되는 소녀는 쥬코와 관계하며 자신의 세계를 찾아갈 실마리를 찾는 듯 보인다. 로베르토 쥬코는 마치 여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각 장면을 누빈다. 그리고 살해하거나 영향을 끼친다.
그가 왜 사람을 죽이는가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죽이는 행위는 밋밋할 정도로 간단히 처리되고, 상황별로 여러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들이 더욱 복잡하고 기괴하다. <로베르토 쥬코>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 ‘죽음’을 사실적인 행위 혹은 풍경으로 간주할 때 작품의 많은 것들은 단순해진다. 그런데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들은 전혀 사실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독백같은 대사들이 내내 뿜어져 나오던 것을 다시 실감했다.
신사 : 나같은 늙은이가 분별없는 일 때문에 이렇게 늦어지게 됐어. 난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지 않을 걸 기뻐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이 미로 같은 통로와 계단들의 교차로에서, 내가 그토록 규칙적으로 드나들어 우리집 부엌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 역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겠더군. 난 내가 매일 오고 가는 투명한 길 뒤에 음침한 터널과 미지의 방향들이 숨어 있었다는 걸 몰랐어. 그런 것들이 있다는 걸 차라리 몰랐었으면 나았을걸. 하지만 바보같이 방심한 동안 알게 된 거지. 갑자기 불빛들이 꺼지고, 그동안 그런게 있는지조차 몰랐던 작고 하얀 전등들만 불이 켜지더군. 그래서 미지의 세계로 똑바로, 할 수 있는 한 빨리 걸어갔지. 나같은 늙은이에게 그런 건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말야. 끝없이 계속되던 에스컬레이터가 멈춘 곳에서 출구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접근이 금지된 철책이 나오는거야.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 이 역에 있는 거라네. 내 나이의 영감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 뭔지도 모르는 걸 기다리면서. (…줄임…)
검은 탁상으로 지하철역의 분위기를 십분 만들어낸 장면이었다. 촛불을 들고 쥬코와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는 노신사의 이 장면은 차분하게 관객들을 집중시켰다. 다른 장면과는 달리 유난히 이 장면에서 쥬코의 표정은 고요해 보인다. ‘조용히 사는 제일 좋은 방법은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쥬코는 실상은 계속해서 세상과 부딪치며 무수히 많은 유리벽들을 위험천만하게 깨뜨리고 있다. 누구나 탈선할 수 있다는 늙은 신사는 자신을 출구로 데려다달라고 말하는데, 정작 무대에서 나갈 때는 신사가 쥬코를 이끈다. 그 마지막 행위가 문득 쥬코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구까지 가는 동안 두 사람은 극중의 유일한 동반자였으리라.
공연의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도 공간도 자기 색깔을 찾아간다.
더불어 쥬코와 부인이 실랑이하던 중 무대 왼쪽에서 장면의 리듬을 만들어나가는 여자와 남자, 조명이 환히 켜지고 태양을 향해 모든 인물들이 얼굴을 들던 마지막 장면, 장면마다 칠판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그 또박또박한 소리의 물질감, 탁상을 모으고 흩뜨리면서 공간감을 살리고 쥬코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보여주던 동선도 강렬하다. 초반에는 인물의 성격이 겉돌고 다소 전형적이라 여겨지던 구석도 있었으나 공연의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도 공간도 자기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극단 작은신화 배우들의 지구력이 놀랍다.
하지만 대사와 그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은 첫 공연에서 발견된 취약한 면이었다. 상대에게 말하는 듯 하면서도 자신을 증명하듯 말을 쏟아내는 인물들의 독백은 그에 맞는 자세, 움직임을 요구할 터인데 탁상의 배치가 설명적이거나 배우들의 움직임이 아직은 설익은 느낌을 주는 곳도 있었다. 또한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탁상을 다시 배치할 때, 탁상은 남자배우들이 옮기고, 수건을 든 여자배우들이 글씨를 지우던 모습은 때로 남녀에 대한 고정된 사고방식을 연상시켜 의아했다.
공연을 보기 전 극장 앞에서 만난 신승훈 100페스티벌 사무국장은 “작년보다 관객들이 더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또 “100페스티벌에서 ‘100(만원)’이란 것은 연극정신에 대한 고민이 담긴 상징적인 구호이기도 한데, 100이라는 숫자, 액수만 부각되는 경우도 있어 아쉽다”며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진행의 어려운 점에 대해서는 “참가구성원들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함께 충분히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때가 있다. 그런 점에 더욱 신경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100페스티벌이 연극의 사회적 위치와 그 기능을 고민하고 연극공동체 만들기의 실질적인 부분에 노하우를 쌓아가는 진지하면서도 도발적인 축제가 되기를 응원한다.
100페스티벌의 얼굴들
보충설명
100페스티벌은 두 작품을 남겨두고 있다.
극단 작은신화 <로베르토 쥬코> 오는 22일(일)까지 우석레퍼토리극장.
극단 한신 <나귀타는 박쥐> 오는 22일(일)까지 블랙박스씨어터.
평일 8시, 토 4시, 7시, 일 4시
문의 02-747-4544 http://cafe.daum.net/100theatre
<로베르토 쥬코>를 만든 사람들
무대 안 사람들 - 박종용, 이은정, 이지혜, 김선영, 고병택, 권대정, 박지은, 박윤석, 전유경, 오현우, 장미희, 김병희
무대 밖 사람들 - 작가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제작 최용훈, 번역 유효숙, 예술감독 장용철, 연출 신동인, 기획 박진태, 조연출 이용설, 무대감독 안재범, 조명 최보윤, 황재성, 음악 김철환, 무대․오브제 박지숙, 움직임 임우철, 의상자문 이유선, 분장자문 이명자, 진행 조용호, 방진영
<100만원 연극 공동체 설립 선언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연극인들은 현시대 대중문화의 흐름에 끌려가는 연극 제작 풍토와 지원금에 기반을 둔 연극제작 현실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대중스타시스템과 상업적 자본으로 무장한 기획마인드, 적당히 안정된 레퍼토리를 찾아 퇴행하는 대중 편향적인 컨텐츠의 경향성 등등. 공동체의 정신에 입각한 연극 예술가들의 자의식과 창조적 열망은 퇴색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대로라면 안정성과 대중성이 보장된 기획 상품만을 쫓는 프로듀서 시스템에 편입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연극이 살아남는 길은 연극만의 독창적인 자리를 찾는 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연극성의 회복에 달려 있습니다. 연극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을 이룹니다. 공동체의 정신은 자신만이 아닌 타자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만나는 사람됨의 기본자세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작은 출발을 뜻합니다. 이제 세대간의 충돌을 통한 화합과 다자간의 소통의 힘을 모아 상업적 자본의 거센 흐름에 저항할 작은 진지를 구축하고 저예산 연극운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100만원 연극공동체'는 관념이 아닌 행동으로 연극성을 회복하고자 선언합니다.
2005년 7월 4일 <100만원 연극공동체> 一同.
* 이상 팸플릿 참고
* 사진제공 - 100페스티벌, 극단 작은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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