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금형은 몇 명인가 - 정금형「금으로 만든 인형」

2009. 4. 10. 12:35Review

정금형은 몇 명인가
- 정금형「금으로 만든 인형」
 
  • 김해진
  • 조회수 944 / 2008.04.17



다원예술매개공간 게스트 프로그램, 정금형 <금으로 만든 인형> 리뷰

 

 

정금형은 몇 명인가

 

 

파란 천이 곡선을 그린다. 작은 배 한척이 떠오르더니, 스르르 움직인다. 순간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서 고요한 집중력이 생겨난다. 천천히 울렁대는 그 배, 바다는 숨을 쉬고 있다. 바다가 숨쉬고 있다니 관용적인 표현인가? 아니다. 천 자락 아래 누운 몸이 실제로 섬세하게 숨쉬며 바닷길을 내고 있다. 바다의 호흡은 점점 가빠지더니 턱하니 숨이 풀린다. 작은 배는 출렁이는 바닷물에 몸을 감췄다가 대견히 다시 떠오른다. 


지난 4월 3일(목) 다원예술매개공간에서 정금형의 <금으로 만든 인형>이 공연됐다. 관객들이 꽤 많이 모였다. 6개의 인형이 출연하는 이 공연은 6개의 에피소드식 구성에 부록 하나를 덧붙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푸른 몸 위에서 항해하는 작은 배는 첫 번째 에피소드 <스펙타클 대서사시>(위 사진)의 깜찍한 인물. 이어서 진행될 스펙타클한 몸들의 항해를 보여주는 전주이기도 했는데, 호흡의 변주라 할 만큼 들숨 날숨의 움직임에 곱고 촘촘한 데가 있었다. 

            <트리스탄>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트리스탄>, <호모호모>, <이졸데>, <피그말리온>, <진공청소기>로 신화와 전설의 이름이 눈에 띈다. <트리스탄>은 팔뚝에 하얀 가면을 썼다. 가면 아래로 뻗은 손가락이 해파리 촉수처럼 넘실거린다. 얼굴 크고 다리 짧은 이 인형은 허공을 헤엄치며 여기저기 쏘다니는데 곧 제 몸의 몇 배가 되는 주인에게 끌려가 가랑이 아래 갇혀버리고 만다. 도망가려고 몸부림치지만 다시 또 끌려간다. 허둥지둥 하는 모습이 익살스러워 깔깔 웃게 된다. 그래서 성적인 관계를 눈치 채면서도 괜스레 감상이 무거워지거나 하진 않았다. 하긴, 섹스가 무겁고 진지한 것이던가? 흠흠, 사람마다 다르겠지.


재밌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금으로 만든 인형> 안에서 섹슈얼한 관계는 배우에 의해 요리조리 구석구석 ‘만져진다’는 점이다. 정금형은 자신의 몸에 탈부착이 가능한 여러 인형들과 함께 쫓았다 쫓겼다 하며 접전을 벌인다. 공들여 시소를 타는 동안 배우의 몸 여러 곳은 인형의 집이 된다. 만지고 만져지는 것 또한 하나의 몸 안에서 이루어진다. 혼자서 조종이 가능한 이 세계는 흡사 자기 자신과 접속하는 몸:기계의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호모호모>


혼자 몸으로 여럿을 먹여 살리는 정금형은 <호모호모>에서 관계의 공터를 보여준다. 공동(共同)의, 혹은 공(0)의 터전은 바로 배우의 몸. 끊임없이 주체와 객체가 전복되는 이 작품은 가랑이 사이에서 머리를 들이밀며 나온다. 배우의 다리는 인형의 팔이 된다. 그 팔을 쭉 쭉 뻗어 앞으로 나아가고 물구나무도 선다. 사실 배우는 바로 섰을 뿐인데도 인형에게는 아찔한 물구나무다. 인형의 얼굴에서 후드티의 모자를 벗겨내거나 자꾸 흘러내리는 옷을 엉거주춤 잡아 올리는 배우는 늘 유머를 잃지 않는다. 반은 배우이고 반은 인형인 <호모호모> 앞에서 맞닥뜨린 것은 자꾸 다른 방향, 통제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나’이다.


작년 7월 아르코예술극장 기획공연 ‘몸짓콘서트’에서 처음 <진공청소기>를 보았다. 먼지를 풀풀 날리는 진공청소기는 힘없이 늘어진 여자를 ‘흡입’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번 다원예술매개공간에서 펼쳐진 <진공청소기>는 그때보다는 빛을 덜 쓰고 먼지도 날리지 않았지만 여자를 탐하는 기계의 얼굴은 여전히 섬뜩하다. 그러면서도 한편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건 왜일까? 씩씩대던 청소기가 결국 작동을 멈추고 욕망은 온데간데 없이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진공청소기>


흥미로운 것은 철저히 ‘타자의 욕망’으로 분한 진공청소기를 정금형이 왼팔로 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우가 스스로를 무력한 타자로 만들고 진공청소기로 생생히 살아나는 이 작품에서 치밀한 힘의 안배를 짐작한다. 혼자서 서글픈 삼각관계를 만들고(<이졸데>), 위아래가 분리된 마네킹을 끌어안고 자맥질하는(<피그말리온>) 정금형은 마지막에 다시 바닥을 훑으며 진공청소기에게 다가와 키스하려 하지만 이내 시무룩해서 돌아간다.(<부록>) 한 시간 여의 공연을 채워나가는 여러 인형과 금형은 솜씨 좋게 바통을 주고받는다.        
    

이 일체형 작업자는 에피소드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보이는 곳에서 거침없이 의상을 갈아입는다. 유쾌하다. 공연을 함께 본 친구와 자극을 받아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했다.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나눠보고 가늠하기 위해서 그녀는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곱씹어 봤을까? 그 과정 역시 스펙타클했을 것이다. <금으로 만든 인형>, 이 서사시가 마침내 어디로 항해해 나갈지가 못내 궁금하다. 


이 글 안에서 뜬금없이 몇 차례 자문자답했던 것은, 자신 안에서 스스로 묻고 답하는 듯한 공연의 구도를 느닷없이 따라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자문자답은 촌스럽게 외로운 티가 나는 혼잣말을 닮아있으나, <금으로 만든 인형>은 행위의 대화라는 걸 부록처럼 밝혀둔다.    


            <피그말리온>



 

보충설명

<금으로 만든 인형>은 인형극에서 어떻게 몸이 더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작품이다. 인형과 몸 사이에서 가능한 언어를 탐구하여 그것이 인형극이면서 동시에 춤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배우의 몸은 인형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인형의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정금형 geumhyung@gmail.com http://blog.paran.com/goldenpuppet

2004. 12. 첫 작품 <피그말리온> 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크누아 홀
2005. 4. 두 번째 작품 <바다괴물> 시도. 좌절됨
2005. 5. <피그말리온> 춘천마임축제 도깨비어워드 참가
2005. 8. 극단 ‘금으로 만든 인형’(줄이면 금형) 창단
2005. 11. 극단 ‘금으로 만든 인형’ 제8회 서울변방연극제 참가
<트리스탄의 탄식> 대학로 연우소극장. 공연 후 극단 해체
2006. 6. 진공청소기를 이용한 인형극 <인공호흡> 무용원 실기과 전문사 졸업공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크누아홀
2006. 9. <인공호흡>을 <진공청소기>로 수정하여 제9회 서울변방연극제 참가함
개막작으로 선정
2007. 5. <진공청소기> 춘천마임축제 도깨비어워드 참가. 공동수상함
2007. 6. 홀로그램 작업을 위한 <거미여인> 구상
2007. 9. 좌절된 <바다괴물> 다시 시도. <스펙타클 대서사시>가 됨
제10회 서울변방연극제 참가. 대학로 씨어터 디아더
2007. 10. <진공청소기> 영국 카디프에서 공연. 다원예술축제, Chapter art center
2008. 2. <거미여인>이 <호모호모>로 발전함. 뽑끼 쇼케이스에서 발표
2008. 4. 정금형의 몸이 탄생시킨 인형들의 모임 <금으로 만든 인형>에서 모두 모임.

<금으로 만든 인형>은 오는 17일(목)까지 제3회 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www.physicaltheatre.co.kr)에서도 공연된다. 대학로 상명아트홀 2관, 저녁 8시

* 이상 팸플릿 참고
* 사진제공 - 다원예술매개공간(www.daospace.net)

 

필자소개

글쓴이 김해진은 극단 ‘목요일 오후 한 시’ 단원.
플레이백 씨어터Playback Theatre를 한다.
grippen@hanmail.net http://blog.naver.com/su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