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극 페스티벌] 두 번째 이야기 "여섯 작품에 관한 릴레이 단상(斷想)"

2009. 11. 13. 03:25Review


[2인극 페스티벌 관람기] 두 번째 이야기

여섯 작품에 관한 릴레이 단상(斷想)

글 매버릭


○ 극단 신기루만화경 <오해>(최명희 작ㆍ동이향 연출)
○ 극단 작은신화 <가정식백반 맛있게 먹는 법>(김숙종 작ㆍ최용훈 연출)
○ 극단 혼의 <잊혀진 노래>(조병여 작ㆍ김태훈 연출)
○ 극단 뚱딴지의 <칼슘의 맛>(김원 작ㆍ문삼화 연출)
○ 극단 앙상블 <지상 최고의 명약>(이강국 작ㆍ반무섭 연출)
○ 극단 오늘 <내영역에서>(강경은 작ㆍ위성신 연출)


10월 17일 토요일 3시. 첫 번째 두 작품, <오해>와 <가정식백반 맛있게 먹는 법>은 나로 하여금 인디언밥에 2인극 페스티벌에 대한 뒤늦은 프리뷰를 쓰게 하고 나머지 작품들을 모두 봐야겠다는 맘을 먹게 한 공연이었다. 참고로 공연을 보면 거의 50% 이상을 잠에 취하는 친구와 함께 봤는데, 그 골치 아픈 관객, 하나도 졸지 않았다! 우리의 공통 의견, “오랜만에 ‘그냥 연극’ 보니까 참 좋다.” 아마 요즘에 워낙 벅적지근하고 요란한 공연들이 많아서 좀 지쳤었나 보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오해라도 해 줘서 고마워요”
The Truth is out there...

<사진 강 현>


<오해>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한 조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여자라면 특히.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주부의 오전 일상은 베란다 수리공의 방문으로 보이지 않는 긴장감에 휩싸인다. 마침 부녀자 강도 살해 사건에 대한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참이다. 수리공과 여자는 밀고 당기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수리공의 수다스러움과 본분을 넘은 참견이 여자는 부담스럽고 불안하다.

베란다 수리공이란 자고로 ‘베란다를 수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선을 넘으려고 할 때 우리는 마주한 타인에 대해 경계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의심이 결코 단순한 노파심으로 끝나지 않는 상황이 때때로 현실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조금만 더 있다 가게 해주시겠습니까?” 어쩌자고 이 남자는 궁금하지 않은 개인사를 늘어놓더니 급기야 베란다 수리와는 상관없는 요구를 하는 것일까. 여자는 끊임없이 경계한다. “할머니의 탐욕은 외로움의 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남자의 대사로 우리는 그의 도가 지나친 수다나 잠재적 범죄가 외로움에 기반 하는 건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얌전한 가정주부의 모습이다. 그녀가 아무리 식칼을 들고 도마질을 시끄럽게 해대며 남자에게 어필해도 수리공 남자나 관객인 우리는 그녀가 ‘여차하면’이란 상상은 도저히 할 수 없다. 여자는 결국 자신이 ‘오해’ 했다고 결론 내리고 반성한다. 그리고 정중하게 사과한다. “오해해서...미안해요” 이에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오해, 아니었어요..” 그리곤 듣지 못한 그녀를 향해 마지막 화해를 건넨다. “오해라도 해줘서 고마워요.”

무관심보단 오해가 서로에게 가 닿는 소통을 위한 지름길인 걸까. 설사 그렇다 해도 오해가 아닌데 오해로 오해한 그 수많은 파국의 결말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The Truth is out there” X파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게 아닐까.


“음식만큼 사람을 외롭게 하는 것도 없어요. 함께 먹어줄 사람이 없으면 쓰레기가 되죠.”

<사진 강 현>


<가정식백반 맛있게 먹는 법>에도 낯선 방문자가 찾아온다. 이번엔 책 파는 외판원이다. “아직 준비가 다 되진 않았지만 그 날이 오늘이어도 괜찮겠지요.” 끈질긴 외판원을 결국 집에 들이는 만화가의 대사가 심상치 않다. 그렇다. 그들에겐 과거가 있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외판원 남자는 자신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또는 기억할 수 없는 죄목으로 인해 비극의 순간을 맞게 된다.

“개구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무책임한 동정과 친절을 베푼 대가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은 당사자에겐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해’가 되기도 한다. 그것도 일생에 걸쳐 ‘한’이 될 정도로 상처를 주기도 하니 말이다. “가끔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길이 정해지기도 하죠.” 그렇게 정해진 만화가의 길, 그런데 그 길을 정해준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만화를 그리는 남편’은 좋지만 ‘만화가 남편’은 싫다고 말하는 아내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책을 파는 외판원이 되었다.

외판원은 만화가에게 가정식백반은 집에서 가족이 함께 먹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그럼 제 것은 가정식이 아니겠군요. 학원에서 배운 그대로니까요.” 만화가는 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는데 그게 ‘가정식백반’이란다. “요리를 배우면서, 음식만큼 사람을 외롭게 하는 것도 없단 생각을 해요. 함께 먹어줄 사람이 없으면 쓰레기가 되죠.”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한다. “오늘 형이랑 밥을 먹게 될 줄은 몰랐어요.” 만화가가 배운 가정식백반은 이제 진짜 가정식백반이 되는 것일까? 정에 굶주린 인간의 집요함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가정식백반’을 뚝딱 거리며 만들어 한상 차려 놓고 ‘혼자’ 맛있게 먹는다. 아마 함께 하는 식탁의 즐거움을 기억하고 있고, 또 종종 그런 기회를 여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혼자만의 식사’가 아니라 ‘언제나 혼자’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10월 24일 토요일 3시. 두 번째 공연은 <잊혀진 노래>와 <칼슘의 맛>이다. 묶음의 기준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나 유추해보건대, 이 두 작품은 묶다 보니 생긴 ‘나머지’처럼 보인다. 그냥 이건 내 추측일 뿐이다. 첫 번째 두 작품은 ‘낯선 방문자와의 소통’ 정도가 공통점이라면 세 번째는 모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반면 두 번째 공연에서는 이런 요소는 찾기 어려웠다. 여섯 작품을 다 보다 보니 나름 이런저런 놀이를..어쨌든.


때론 잊혀질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론 그냥 눈감을 수 없는 일도 있고...

<사진 강 현>

<잊혀진 노래>. 4주 후에 어떻게 될 지 궁금한 연극.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신구가 툭 튀어나와 4주 후에 보자고 할 것 같다. “나는 자고 있었고 당신이 먼저 시작했어.” “너도 다리를 벌렸어.” 누가 먼저 옆구리 쿡쿡 찔렀냐는 논쟁이 시작될 즈음이면 소위 ‘결정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증거다. 여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자신의 ‘잊혀진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해 ‘모험’을 선택하려 하고 남자는 결국 인생은 다 비슷하다며 ‘안정’을 주장한다. 글쎄,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여전히 때때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렇고 그런 관계와 시간에 관한 이야기.

라고 끝내버리면 너무 시니컬한 걸까? 정말 ‘천년의 세월을 석가탑이 견딜 수 있었던 건 그 앞에 다보탑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냥 눈감고 있어. 그게 덜 아프고 좋아.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우리도 그랬잖아. 금방 지나 갈 거야. 일요일 때문에 일주일을 버릴 수는 없잖아” 남자는 말한다. “나 살 거야 죽은 척 말고..살 거야..나 살래..마음 가는대로..그러려면 어쩔 수가 없어.” 여자도 말한다. 그냥 좀 기다려 보는 것도, 늘 아닌가 싶으면 ‘마음’을 핑계 삼아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도, 세월을 견디는 지혜라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어떻게 기다려 볼 건지, 어떤 과정을 거쳐 다른 선택을 할 건지 좀 더 고민해야지 않을까? 아쉽게도 <잊혀진 노래>는 그저 그냥 그런 ‘드라마’에서 멈추고 만다는 느낌이 든다.


딸기‘맛’ 사탕과 바나나‘맛’ 우유와 소고기‘맛’ 조미료, 그리고 칼슘의 맛?

<사진 강 현>

<칼슘의 맛>은 극단 이름대로 뚱딴지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어서 많이 본 뚱딴지라서 그렇게 신선하진 않다. 특히 이런저런 만화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위주의 이기적인 문명 비판’이 주제라고 한다. 미래 사회의 인공식품을 다룬다. 자연 파괴로 음식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 열량과 합성의 맛을 가진 인공식품을 만들지만 영양소까지 지닌 음식을 만들지 못해 부작용에 시달린다. 급기야 영양소 합성을 위한 고군분투.

“복제된 칼슘은 어떤 맛일까요?” 연구실 조수가 묻는다. “칼슘의 맛? 칼슘의 맛은 과학이 만들어낸 신성한 맛이야.” 과학자는 말한다. 우리는 딸기‘맛’ 사탕과 바나나‘맛’ 우유와 소고기‘맛’ 조미료를 먹는다. 그리고 연극에서 결국 칼슘의 ‘맛’을 본 조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그래서 알 수 없다. 그 맛이 도대체 어떤 맛인지.

공연을 보고 나와서 나눈 대화 한 토막. “배우들 연기가 나쁜 건 아닌데 왜 좀 지루했던 걸까요?” 나의 대답은, “흠...그건 우리가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일 거야. 텍스트 자체에 감흥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해.”


10월 31일 토요일 7시. 마지막 공연은 <지상 최고의 명약>과 <내영역에서>. 세 번 본 것 중에 가장 관객이 많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다 그쳤고, 이번엔 혼자였고, 그리고 작품은 둘 다 모두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생의 소중함’이 어찌 쉽게 깨달아지겠는가...

최근 부쩍 죽음에 관한 연극을 많이 만난 것 같다. 특히 자살이라는 화두를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고 느낀 건 그냥 개인적인 우연이었을까. 현실에서 우리는 올해 그 어느 때보다 비일상적인 죽음들을 많이 겪었다. 모르는 이가 없을 유명한 여배우가 아이 둘을 남기고 목을 맸고, 대통령을 지냈던 이가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우리는 이런 죽음을 종종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급작스런 죽음에 몰리고 있다.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생을 정리할 여유도,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을 준비할 새도 없이.

<지상 최고의 명약>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보다 극적이지는 않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자살하려는 청년과 불치병에 걸린 딸을 보며 어리석은 죽음들을 바로 잡으려는 한 남자가 만나 벌이는 한 편의 헤프닝.

‘생의 소중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공연’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우린 이미 다양한 죽음을 통해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 보편적 진리를 깨닫기에 공연은 수심이 그리 깊지 않았다. 단지 짝사랑하던 아나운서가 사실은 자신과 자신이 배달하던 칼국수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 깨달을 생의 소중함이라면 말이다.



“여보, 저 짐은 어떻게 하지?” “무거운 짐, 이젠 벗어버려.”

<내영역에서>를 보고 난 감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깔끔한 신파’ 정도 되겠다. 때때로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서 만나는 건 반갑다. 요즘은 가끔 예술이 너무 매몰차지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말이다. 소재는 진부하다면 진부할 수 있는데 배우들의 연기도 지루하지 않고 구성도 짜임새가 있어서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이미 죽은 남편이 죽음을 앞둔 아내를 마중 나오는 이야기다. 사연 많은 인생, 억척스럽게 한 세상 살아 온 아내에게 평생 속만 썩이다 죽은 남편이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다.

딸네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에 왔으나 역무원은 자리를 비우고 무임표를 구하지 못해 한 없이 기다리고 있는 아내. 마침 나타난 죽은 남편과의 이런저런 수다가 이어진다. 이혼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부부인양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대화를 이어가는 부부는 이승의 애증을 넘어 길동무가 된다.

역무원이 사라진 매표구에 어느새 남편이 있다. “표 하나 꺼내 줘.” “아직 아니야. 아직, 당신 차례가 아니야.” 아내는 어리둥절하다. “아직 모르겠지? 누구나 처음엔 그래.” 결국, 때가 된다. 아내는 이내 자신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 옛날 남편에게 했던 부탁, “꼭 마중 나와요.” 남편은 약속을 지켰다.

“여보, 저 짐은 어떻게 하지?” 딸네 집에 가느라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보따리를 아내가 바라본다. “무거운 짐, 이젠 벗어버려.” 부부가 나란히 내영(來迎)역 개찰구를 통과하면서 극은 끝나고 우리는 담담하게 그들을 보낸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배웅’을 부탁한 적이 있다. 이기적인 부탁이 아닐까 미안스러워 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면 난 ‘마중’을 나와야 하는 거구나. 선택이 가능하다면 내가 마중 나오는 쪽이면 좋겠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마중이든, 배웅이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누군가 손 잡아줄 사람 하나쯤은 두면서 살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한 일일게다.



[2인극 페스티벌 관람기] 첫 번째 이야기 "그들만의 매력적인 게임의 법칙, 2인극을 만나다"


필자: 매버릭 http://blog.naver.com/indiepr
maverick);〔송아지에게 낙인을 찍지 않았던 Texas의 목장주 이름에서〕 n. 《미》
1 낙인 찍히지 않은 송아지;어미에게서 떨어진 송아지
2 《구어》[종종 형용사적으로] 독립 독행하는 사람;무소속 정치가[예술가 등], 이단자, 반체제파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