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의 사랑하는 너>@신촌극장

배우 김신록의 누군가 할 때까지 일단 나라도 한다 연기비평

해방된 배우

<나의 사랑하는 너>

강서희, 류경인, 황순미 출연 / 설유진 작연출

_김신록

<경험하기와 드러내기>

연기가 표현의 일종이라면, 이 표현,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드러내어 나타냄이라는 부분이 순전히 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경험하는 것은 오롯이 배우의 몫이다. 배우는 이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경험함드러내어 나타냄사이에서 아슬 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다. ‘경험함에 치우칠 경우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는 배우, ‘드러내어 나타냄만 두드러질 경우 진정성 없는 배우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짧은 연습 기간, 관객의 이해력에 대한 불신, 주제를 전달해야 한다는 조바심, ‘언어나 몸짓이라는 배우의 표현 매체에 대한 기술 훈련이 주를 이루는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표현의 무게 추가 드러내어 나타냄쪽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것 같다.

극작/연출하는 한 동료로부터 연극을 보면 배우들이 너무 많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던 적이 있는데, 아마 동선이나 제스처로 감정이나 상태를 드러내어 나타내는 몸때문에 배우들이 경험해야 할 생각이나 느낌 따위가 얕아지거나 설명적이 되는 순간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경우 드러냄이 경험을 앞지르는 상황, 다시 말해 관객의 경험이 배우의 경험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셈이다. 만약 반대로 관객의 경험만큼 배우의 경험이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어떨까. 더 이상 무대가 정답을 제시하고 관객이 정답을 맞히는 식의 일방적 소통 구조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배우가 드러내어 나타냄에 대한 조바심에서 조금 더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201812월의 끝자락에 20석 객석의 신촌극장에서, 경험함이 드러냄보다 앞서는, 지켜보는 관객의 경험보다 연기하는 배우의 경험이 더 소중하게 다뤄지는, 한 편의 연극을 보았다. 

 <나의 사랑하는 너>

이 연극에서 배우들은 서로를 지향하지 않고 거의 모든 순간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 정면 지향은 기성 연극에서 흔히 사용되던 소위 논두렁 연기’(정면을 보고 저 멀리로 대사를 던지는 표현방식)와는 감각적으로 다르다. 앞에 앉은 관객을 상대 배우로 설정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도 없고, 그렇다고 관객을 지향해서 관객에게 말을 걸겠다는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혹은 이 시선의 엇갈림이 무한 우주 속 어긋난 시공간같은 어려운 철학적 주제를 구현하고 있지도 않다. 작고 좁은 극장이니 당연히 내용을 잘 전달하겠다는 열심 역시 아니다.

배우들은 그냥 앞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영화를 찍듯, 앞쪽에 카메라가 있는 것처럼. (과거 회상 등 특정 순간에는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기도 한다) 관객은 공연이 진행되는 75분 동안 자신이 상대배우인 듯, 관객인 듯, 아니면 그냥 자기 자신인 듯 그 눈길을 마주하게 된다.

 19년 만에 처음 만난 점심 자리에서 한 여자(지원, 류경인 배우)가 다른 여자(선주, 황순미 배우)에게 미안해라고 사과한다. 다른 여자는 계속 뭐가?’라고 되묻는다. 극 전체는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사과하고 다른 여자가 이 사과를 결국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둘은 중학교 3학년 때 단짝이었고,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어떤 이유로 갑자기 멀어졌다. 둘은 서로가 멀어지게 된 정확한 계기를 알면서도 결코 그 계기를 입 밖으로 발화하지 않고 변죽만 울린다. 극이 진행되면서 그 계기가, 사건이, 기억이, 말이,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결국 폭발하고, 둘은 서로를 당기고 밀친 그 실체가 사랑이었음을 고백한다. 선주가 떠나고 남은 지원에게 카페 알바 재희(강서희 배우)가 다가온다. 재희는 울고 있는 지원에게 사랑한다고, 첫 눈에 반했다고 말한다... 그 때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카페 테이블이라고 설정된 곳에 관객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은 지원과 선주, 그리고 테이블에 자꾸 물을 따라주러 오는 재희는 서술체와 대화체, 독백체를 섞어 쓰며 발화한다. 소설을 각색한 것이 아님에도 서술을 통한 묘사가 사용된 독특한 형식의 희곡이다. 소설을 희곡으로 완전히 각색하지 않고 무대화하던 기존의 여러 연극작품에서 배우들은 주로 서술자로서의 배우인물을 재현하는 경험자로서의 배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나누고, 이 두 정체성을 오가며 선명하게 분리된 발화 방식을 택해왔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배우들은 서술체와 대화체의 발화 방식을 따로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대사 후 서술을 덧붙일 때 일부러 시선을 빼거나, 몸의 태를 바꾸거나, 목소리를 바꾸거나, 말투를 바꾸지 않는다. 희곡을 위해 자신의 흐름을 훼손하기 보다는 그냥 배우 자신의 내적 흐름에 기대어 발화들을 이어가버린다. 이런 덜 분화된 발화방식은 배우가 희곡의 형식 미학을 관객에게 잘 전달하려는 의무보다 자신의 내적 체험의 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짜릿한 전복의 감각을 제공한다.

관객들은 지원과 선주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기 이전에 객석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과 눈빛, 작은 손동작, 미묘하게 바뀌는 자세를 통해 두 사람 각자의 내적 상태를 먼저 인지하게 된다. 이 모든 디테일은 정밀하게 계산된 것이라기보다는 내적 경험의 결과물로 순간순간 되어지고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특히 지원 역의 류경인 배우는 때에 따라 얼굴이 붉어졌다 창백해졌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삼켜졌다 하는 식으로 마음의 세부가 얼굴에 그대로 스며 나와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을 지켜볼 수 있는 귀한 경험을 선물했다. 

<해방된 배우>

무대에는 연극적 카리스마가 없다. 강서희, 류경인, 황순미 배우는 연기적 클리셰로서의 에너지를 뿜어내지 않는다. 배우들은 표현을 아낀다. ‘드러내어 나태내기보다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느낌을 꾹꾹 눌러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우들은 인물에, 희곡에 자신을 다 내어주기 보다는, 배우 자신을 잃지 않고 꿋꿋이 희곡을 겪어내며 밀려드는 기억, 차오르는 말들의 흐름을 헤쳐 나간다.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속에도 기억이, 감정이, 말이 차오른다... 그 때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해방된 관객(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이라는 책 제목처럼 관객은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가”(p.25)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배우 역시 느낌과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와 경험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해방 되도 되지 않을까. 객석에 앉은 해방된 관객이 무대를 보며 자신만의 경험과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펼쳐나간다면, 배우 역시 조바심 내지 말고 매 순간 경험되는 이미지와 생각과 느낌에 더 깊이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배우가 관객의 경험만큼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여길 때, 이럴 때에야 비로소 연기라는 표현행위가 배우 자신에게 소모적인 것이 아닌, 건강하고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_907 제공(권영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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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김신록

 소개_연극하는 김신록입니다. 오늘부터 잘 살아야지


 

[공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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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다른 여자를 기다린다.
20년 만이지 했지만, 19년 만이라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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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 사랑은 소문 같은 거였으니까. 
나는 줄도 모르는 거. 하는 줄도 모르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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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거리를 걷는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만든이] 

출연_류경인 황순미 강서희

작/연출_설유진  

조명_신동선 

음향_목소 

의상_강기정  

기획_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