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2. 07:43ㆍReview
스스로 흐르는 노래들
고 김용균님 추모 앨범 ‘몸의 중심’
글_ 예쁜사람
소리가 될 생각이 없는 노래가 있다면 이 음반의 노래들이 그럴 것이다. 이 노래들은 사람들에게로 퍼질 생각이 있나? 아닌 것 같다. 들려주기 위해,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 있는 노래들도 아니다. 이 노래들을 다른 노래들처럼 소비하기는 어려웠다. 이 음반 속 노래들은 내가 귀에 계속 넣는 소리들로서는 부적절하다. 원래는 노래가 아닌 것이 노래된 것 같기도 하다. 재생된다는 상태는 이 노래들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죽음 가까이에 모인 노래들, 한 사람의 부재 곁에 모인 노래들이여서일까? 이 노래들이 들려진 뒤를 이야기하는 이 글은 꽤나 횡설수설할 것이다. 이 노래들은 뭐길래, 이 노래들은 어떻게 되기 위해서 나를 둘러 서있나? 아니, 이 노래들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나? 나는 잡히는 가닥 없이 노래 목록을 떠다니면서 내게 어떤 말이 생기는지 보기로 했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그곳으로 온 몸이 움직인다.
-수록곡 ‘몸의 중심’ 중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라고 화자가 주장한다고 하자. 이런 주장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를 해보겠다. 우선 나는 몸의 규칙과 전혀 다른 규칙을 도입하는 것이 꼭 나쁠 것일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이 노랫말처럼 중심이란 전체의 방향, 전체가 향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주장의 내용은 그러니까 내게는 크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 노래가 하고 있는 것은 사실 주장이 아닌 것 같다. 이 노래는 선언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는 믿음, 확신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뭐라 내 생각을 얹기 어렵겠다. 느낌 사이에서 가닥을 찾아보려 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듣다가 나는 왠지 성서나 찬송가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경험해본 종교가 그뿐이라 그렇겠지만. 분위기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는 뭔가를 이 노래들이 공유한다. 이 노래들은 마치 신앙고백 같다.
그럼 이 노래들은 찬송가라고 할 수 있을까? 찬송가는 자신의 확신을 크게, 여럿이 함께 떠들지, 듣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함께 신에게로 노래하는 것이다. 나의 복음을 함께, 같은 노래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듣는 사람은 나의 복음을 공유하는지 아닌지 중요치 않다, 사람이 들으라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찬송가를 부르는 일은 신앙의 고백보다 주기도문에 더 가깝다. 기도에 응답할 이에게 들리기 위해서 믿는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찬송가이다. 어쩌면 ‘예수 믿으세요’ 소리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행인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는 자신의 행위로 기도를 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사실 신이 들으라고, 신에게로 닿으라고 하는 말이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바라고 비는 것이다. 찬송가는 노래가 된 기도이다. 그런데 바라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것 같다. 같은 것을 바랄 수는 있지만 같은 것을 믿을 수는 없다. 우리의 기도는 있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없다. 각자의 신앙은 각자의 것이다. 신도들은 신앙고백을 하며 그들이 같은 복음을 믿는다는 점, 그들의 함께 사도됨을 이야기한다. 이는 기도가 될 수 있으나, 기도와 같지는 않다. 사실 기도는 신이 바라라고 명한 것을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신에게로 열납되어야 하는 기도, 찬송 말고 이 음반의 노래들은 뭔가를 함께 바라는가? 그렇다면 같은 것을 믿는가?
친구야 사진 속의 너는 이제 없고, 너의 바람만이 우리에게 남았다.
친구야 너의 빛나는 눈은 사라지고, 너의 죽음이 남아 우리를 울게 한다.
-수록곡 ‘너의 소원은’ 중
이 노래들이 왜 찬송가가 아닌지 알 듯도 하다. 이 노래들이 고백하는 각자의 신앙은 어느 부분은 서로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같지 않다. 이 음반의 노래들이 찬송가와 신앙고백적 성격은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 노래들이 모여 있는 곳은 다르다. 이 노래들은 신이 없는 채로, 공유된 복음이 없는 채로, 신앙고백을 하는 일로 하나의 음반이 되어 모여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노래 하나 하나는 마치 한 명의 사람 같다. 이 노래들에는 가닿고자 하는 신이 없다.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예배를 위해서 사용되기 위함도 아니다. 이 노래들에는 바라는 것도 없으며, 친구의 바람이 남아있고, 친구는 이제 없으나, 친구의 죽음이 남아있다. 이 노래들의 바람이 있다면, 각자의 신앙을 가지고 모이는 것일 것이다. 바라지 않고 모여서 믿음을 말하는 이 음반은 어떤 마음들을 기념하는 자리에 있다.
이 앨범은 추모 앨범인데, 추모는 기념인가? 추모하는 일은 기념하는 일인가? 추모하는 일은 기념하는 일보다는 기억하는 일과 비슷하다. 추모는 일시적일 수 있고, 사라질 수도 있고, 미래의 반복됨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노래들은 추모 앨범으로 모임으로써 기념물이 되었다. 그런데 추모의 대상인 고 김용균 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마음들의 기념물이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념할 수는 없을까? 죽음을 기념하고 잊지 않는 일은, 그 죽음으로 인해 벌어진 행동들로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한 죽음의 의미를 새기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 음반은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신앙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그 모여있음으로써만 그 죽음을 기념한다.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 콘서트 포스터
나는 노래와 춤, 그림과 사진, 글이나 영화가 어떤 죽음 자체를 기념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예술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을 담아두는 마음이 하나의 작업을 만들었다는 사실로 가능할 것이다. 그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 그 죽음을 추모하는 마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 음반으로 기념된다. 그 마음들은 그 죽음에 새로운 이야기와 의미를 덧붙일 수도 있다. 예술은 풀어낸다. 예술은 마음들을 풀어주어 그 마음들이 있었음을 기념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풀지 않고도 꾸역꾸역 살아내려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의 몸짓을 공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그럼 그 자체를 기념하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어도 이미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반은 기념의 몸짓으로 있다. 나의,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너의 바람, 친구의 바람에 대해 각자 말해야 한다는 신앙으로 노래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고 김용균님 추모 음반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면서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음반의 노래들이 선언하는 내용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노래들이 모여 이루는 모양과 모여 있는 자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노래들에 대해서도 아니고, 노래들의 모임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한 죽음의 의미는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미리 포기하고 그곳을 슥 피해 옆으로 빠져버렸다. 우리들이 실제로 어떻게 같이 살아가야 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현실에서 일어난 상실과 고립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슬퍼하다가 지쳐버린다. 실제의 우리의 삶과 죽음은 믿음과 너무 가깝다. 나는 타인의 믿음은 물론 심지어 나의 믿음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믿지 말라 혹은 믿으라는 말은 넌센스이다. 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이들의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 손가락으로 통제되는 소리로 차있던 세상은 이미 일시정지 되었다. 노래가 스스로를 재생하고, 나는 가만 고여 있다.
*고 김용균님 추모 앨범 관련 페이지
필자_예쁜 사람 소개_체력은 나쁘지 않으나 생각이 주로 불순하고 복잡하며 꿈을 하나씩 지우다 못해 독립의 꿈조차 (포기가 아니라)꾸지 않고 빌붙기에만 점점 능해지는 잡스럽고 쿨하지 못한 고양이 키우는 사람. |
[몸의 중심] - 故 김용균 노동자 추모음반 이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이 잊혀지지 않도록,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추모하여 결국에는 세상을 위해 움직일 수 있도록 예술가들이 힘을 합쳤습니다. 故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은 청년 문제, 비정규직 문제, 노동 안전에 대한 문제 등 대한민국 사회가 품고있는 여러 모순들이 복합적으로 빚어낸 비극입니다. 참여 예술가들은 참담함을 느끼고 있으며 국가와 사회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가 지닌 모순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예술가의 방식으로 함께 싸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양한 세대의 음악가들이 마음을 합쳐 음반을 만들었습니다. 미술가들은 붓을 들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로파이, 네오포크, 전자음악, 재즈 등 여러 장르의 추모곡들을 수록했습니다.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앨범판매를 통해 거두어진 수익금은 음반 제작을 위한 실비를 지출한 뒤, 전액 故 김용균 시민대책위에 투쟁기금으로 전달됩니다.
Track List 1. 문진오 - 몸의 중심 (정세훈 시, 문진오 곡) 2. 류금신 - 눈녹듯 (황경하 작사, 곡) 3. 건주 - 몽혼 (건주 작사, 곡) 4. 김가영 - 마지막 포옹 (유인애 시, 문진오 곡) 5. 정수민 - 쉼 (정수민 작곡) 6. 경하와 세민 - 소성리지킴이 조현철 (황경하 작사, 곡) 7. 김민주 - 시간이 되면 (김민주 작사, 고광표 작곡) 8. 삼각전파사 - 물결 (삼각전파사 작사, 곡) 9. 세민 - 너의 소원은 (세민 작사, 곡) ----------------------------------------------------------------- 기획 : 문진오, 배인석, 황경하 프로듀서 : 문진오, 황경하 녹음 : 문진오, 황경하 믹싱 : 황경하 마스터링 : 이재수 (소노리티 마스터링) 퍼커션 : 설호종 일렉기타 : 최현종, 황경하 키보드 : 세민 콘트라 베이스 : 정수민 녹음실 및 음향협찬 : (재)마음 동행 공연음향협찬 : (주)프로믹스 그림이야기 사회 : 배인석 시 : 유인애, 정세훈 사진 : 황경하 미술 : 김기호, 김병주, 배인석, 송효섭, 전기학, 정윤희, 천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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