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박원순 개인전》"‘박원순’이라는 호명의 효과!?"

 

‘박원순’이라는 호명의 효과!?

《박원순 개인전》 @상업화랑

글_김민관

박원순 개인전 전시 포스터_일상의 실천

 

명명과 재명명을 통해 은폐 전략

아마 이 전시의 운명은 작가가 없는 전시로 종결될 것이었다. ‘박원순’은 여기서 호명되고 있는 반면, 그는 필시 응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박원순이란 이름은 (그와 거리를 두는) 비판적 재전유(*1)의 이름이며, 그가 이곳에 옴으로써 완성시키는 전시란 자신과의 간극을 그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원순이란 이름은 이전이라면 ‘박근혜’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이명박’이. 사실 그런 자리의 이름인 것이다. 어쩌면 그런 자리의 이름이 예술의 영토 안에서 호명될 수 있다는 것이 박원순의 서울시, 그리고 나아가 문재인 정부의 표현의 자율성을 담보하는 현재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이것은 좀 긍정적인 상황인 건가.

사실 이 전시는 대부분 예술가들이 이곳과 맺는 관계성을 비추거나 진단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또는 추후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을 ‘공백’으로 둔다.(*2) 한편으로는 작가들은 자신들이 하던 그대로 예의 그 드러나지 않는 작품의 모호성, 또는 작품 자체의 특이성과 독창성을 물리적 형태로 구축하는 것으로 수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실은 박원순이라는 저자성을 박원순이라는 텅 빈 기표에 넘겨주는 가운데 작가들은 어시스턴트라는 이름을 쓰며 저자성을 그대로 보존한다—일 대 일로 작가는 어시스턴트로 교환된다. 그러니까 박원순이 물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저자가 아닌 하얀 배경이 되어 무엇이든 색칠하고 그릴 수 있으며 그 바깥으로 호명될 수 있게 될 때 박원순은 예술의 너른 영토 그 자체(무엇이든 할 수 있으나 무엇으로 귀결되지 않는 예술)에 그칠 공산이 큰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전시는 전시 제목이 없다. 누구 누구의 전시 다음에는 전시 제목들이 따라붙는 것이 보통이다.

작가가 없고 전시 제목이 없고 따라서 전시의 주제가 없는 이 전시는 그 두루뭉술함 뒤에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모호하게 전제한다. 그것은 비변증법적이다.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표현하는 예술이 존재한다.’, ‘예술이 관계 맺는 사회가 존재한다.’라는 것—물론 예술의 파급 효과를 가상의 현실로 상정하는 홍보 전략이 있다. 결국 이 전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정도의 사실 또는 가능성이다. 예술이 사회에 개입해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거나 하는 예술의 운동성과 사회 참여적 태도는 지양되어야 하는데, 예술의 태도는 그런 것이 아니며 예술가의 위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로부터 거리를 둘 때만 예술(가)은 순전히 예술(가)일 수 있다—사실상 이 부분으로 인해 이 전시에 대해 거는 기대가 이 전시를 굴절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전시와의 간극을 형성한다는 것, 이는 이 전시가 갖는 딜레마다(이 전시는 좋은 예술이라기보다 착한 예술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이 전시를 결론짓는다). 그것이 어시스턴트라는 명명이 지우거나 포기한 듯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보존하는 예술가의 이름, 자리인 것이다. 곧 이 전시는 ‘박원순’이란 이름을 직접 내세웠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지만, 동시대의 일반적인 전시가 갖는 예술의 절대적 형식성을 수호해 낸다.

그러니까 이 전시는 단순히 말하면, ‘박원순’이란 이름을 빼면 사실 그냥 일반적인 전시인 것이다. 여기서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맥거핀인데, 하지만 그 맥거핀이 사실 만드는 효과가 이 전시의 중핵(적인 간극)이기 때문에—소위 ‘어그로’를 끄는 전략이다—그리고 그것이 또한 예술의 태도라기보다는 형식이기에—이러한 지시는 아무래도 비장미 넘치는 비판이 아닌 패러디와 부인으로서 일종의 스웨그이다—, 박원순이란 이름은 이 전시를 끊임없이 부풀리지만 그것은 이 전시에 대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 반대 역시 성립하지는 않는다. 곧 이 전시가 박원순을 결정짓는 것 역시 아니다.(*3))

전시의 실질은 따라서 전시/작품들(에 있는 게 아니고 전시/작품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있고(곧 이 전시가 여느 전시와 다른 특이성(을 구성함)은 박원순이란 이름이 떠돌며 전시와 달라붙는 데 있다), 그것을 얼마만큼 잘하느냐가 전시를 판가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곧 작업이 작가로 수렴될 때 이 전시는 박원순 개인전이 아닌 ‘그냥 전시’인 것이고, 그럼에도 이 전시가 박원순이란 이름과 함께 사라지지 않기 위해 곧 작가가 박원순으로 수렴되지 않게 하기 위해—더 정확히는 작가가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어시스턴트라는 장치가 필요했으며, 그와 동시에 작가들은 사라지면서 박원순이라는 이중의 저자 또는 대상을 만들며 ‘그냥 전시’ 역시 벗어나고자 한다.(*4) 아마도 여기까지가 이 전시에 대한 전략과 구상의 일단일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다시 말하자면, 어시스턴트란 이름은 박원순을 형식적으로 보존하면서 작가의 자리를 박원순에서 작가로 실질적으로 위임한다. 동시에 박원순과의 매개를 자처하면서 그와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또는 그러한 거리를 지시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작업은 (박원순이 아닌) 작가들의 포트폴리오가 될 것이다.

 

박원순 개인전이 열리는 화랑 너머로 보이는 을지로 청계천 풍경, 사진_최철림

 

박원순을 매개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럼에도 아직 작업들을 들여다본 것은 아닌데, 어떻게 박원순이라는 이름이 작업과 전시에 기워지거나 박원순을 기입하는지, 또는 기입되거나 기입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진 않은 것이다. 앞선 공백의 자리를 보존하는 것, 곧 을지로/청계천과의 관계성을 전면에 작업으로 내세운 건 드물다. 그 첫 번째 예외라 할 수 있을, 을지로/청계천 주변의 상인들의 목소리, 간판 상호 들을 수집하여 포스터에 나오는 <I · REMEMBER · U>의 작업의 경우, 한정림 작가의 행동은 그들을 직접 매개하는 데 그치는 대신 그것을 지우는 전략을 덧대—여기서 앞서 언급한 ‘작가적 거리’를 작가/작품은 유지하게 된다—박원순 행정의 ‘끔찍스런 재개발’의 행위를 지시한다. 곧 그 결과물로서 발생하는 폐허의 이물질을 낙하시키는 퍼포먼스를 통해 박원순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작품에 투사하는데, 그로써 이 이물질은 박원순을 가리키기보다 작가의 아픔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박원순을 넘어설 수 없으며, 그것은 실질적으로 다 지워질 수도 없다는 점에서—전시 마지막 날에도 실질적으로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무엇보다 이것은 실질적인 작업으로 전시장을 지지해야 하고, 차라리 그런 지우개 가루는 박원순에게 실질적으로 도달하지도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종의 수행적 퍼포먼스의 결과는 작가의 눈물방울들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작가는 무엇보다 박원순 행정 자체가 될 수 없으며, 사실상 현상과 완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이 작업은 이후 살펴볼 다른 작업들과 상이한 궤도를 형성한다.

이어 여러 작업들 중 전시장과의 경계를 구성하는 작업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실제 전시장 바깥을 벗어날 수 있는 작업은 온라인 이벤트 응모를 통해 당첨되면 가져갈 수 있는 CMYK의 선물 박스 <겨울나기 이벤트>, 그리고 박원순 관련 타이포그래피와 이미지 들 중 일부를 자율적으로 선택해 출력 후 가져갈 수 있는 일상의 실천의 프로파간다의 전유/굿즈 버전, <UN-KNOWN.XYZ(미지수)>가 되겠다. 물론 전시 포스터 하나가 더 있다. 실제 포스터 작업은 대중들이 자리하는 공간들을 배경으로 한 이미지 합성을 통해 예술의 사회적 효과를 가상으로 구성하여 실제 이것들이 퍼져나가는 방식을 통해 SNS상의 이미지 경제가 지닌 파급 효과를 창출했다. 박원순이란 이름이 우리 사회의 공통의 이름이듯 포스터는 예술의 이름을 모두를 위한 이정표인 양 농담을 걸며 전시를 홍보했다.(*5)

일상의 실천의 작업이 선택적 체험을 통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디자인 작업에서의 저자/주문자의 몫을 박원순 바깥의 사람들에게 양도하며 원본이 없는 실체들을 다만 잠재하고 있다면, <겨울나기 이벤트>는 전시 관련 이벤트용 견본이 되어 그것 스스로의 전시품으로서의 지위와 거리를 둔 채 상품의 기능을 갖는다. <UN-KNOWN.XYZ(미지수)>가 박원순을 비판하는 하나의 이미지-텍스트를 제시하는 게 아닌, 그것을 관객 각자가 투사하게 하도록 만든 장치를 통해 작가가 어시스턴트가 된다면(이러한 장치는 박원순에 대한 비판을 용이하게 하지만 박원순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가하는 것은 아니다), <겨울나기 이벤트>는 불특정한 모두가 가질 수 없는, 설사 그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열지 않는 이상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완벽한 상품이 된다. 하지만 이로써 전시장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전시장과의 경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겨울을 난다는 것은 ‘거처’를, 그리고 거처를 상실하는 이곳 일대를 상정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감정을 투사하는 대신 자본주의 논리의 회로를 형상화한다. 사적 소유를 통한 소수의 윤택한 생존은 생존 불가능성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기보다는 그(을지로/청계천) 바깥의 사회적 경제를 상정하는 데 가깝다.

최황 작가의 <사건 지평선>은 포털 사이트들의 ‘거리 뷰’ 혹은 ‘로드 뷰’에서 제시한 2010년부터 2018년 사이에 있는 몇 년간의 세운상가, 대림상가 주변의 길들의 이미지로써 구성한 작업으로, 골목 안쪽을 촬영하지 않은 탓에 내부 시공간은 경계로 남아 있다는 점은, 가령 블랙홀과 같이 한 번 들어간 물질이 그 바깥으로 나올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에서의 동명의 개념을 전유한 것이다. 작가는 직접 을지로/청계천 주변의 이미지를 찍지 않고 더듬거리며 작동하는 이전의 수집된 이미지들을 통해 이곳을 직접 현상하지 않고 그에 대한 정서를 물리치고 객관적 거리를 전유한다. 곧 경계를 상정/전유함은 표피적 이미지 수집 장치에 대한 비판적 제스처가 아니라 바로 그런 장치를 통해 작가의 자리를 보존하는 것으로 수렴된다—‘작가는 현실의 안에 있지 않고 경계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미지들은 선명한 현실의 재현이 아닌 현재의 어떤 뿌연/열화된 버전의 일부로, 과거에서 영원한 과거가 될 이미지들로서 현재에 대한 예방접종과 같다.(*6)

정용택 작가의 <봉산개도 우수가교(逢山開道 遇水架橋)>(*7)는 사실 전시 제목에 비춰 박원순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작업이다.(*8) 대략적인 내용으로 시장 연설에서 재개발 정책의 반대편에서 도시의 오랜 지역 자원을 보존하는 것의 우수성 등을 천명하는 박원순의 육성이 을지로/청계천 일대 등의 이미지와 맞물리는 가운데 그와 다른 자막이 더해지는데, 이는 그 반대의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상인 등의 목소리 그러니까 음성은 지워진 그들의 말들로, 잘 보이지 않게 이미지(현실)에 겹쳐진다.(*9) 이런 뚜렷한 강약의 다성부가 현재의 현실을 지시한다. 박원순이 이 전시의 주체가 되지 않는 것처럼—이는 <사건 지평선>에서 역시 반복된다—박원순의 얼굴은 영상에서 나오지 않으며 박원순의 지난 목소리(보이스 오버)와 허물어지는 현실의 간극은 정확히 박원순의 (이중) 인격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이는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대한 강조보다는 박원순의 이전과 이후를 경계로 나누는 데 초점이 있다. 이러한 측면은 이미지-시간의 인용을 통해 현재에 대한 관점/위치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실제 하나의 스크린/장소에서 연이어지는 작업인, <사건 지평선>을 떠올리게 한다.

오세린 작가의 <귤쨈, 마그마>는 상하거나 또는 시장 가치가 없는 귤을 작품 소재로 사용한 작업으로, 쓸모없는 사물에서 쓰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예술의 일정 가치를 상기시키는데, 전시로 연장하면 이를 통해 사라질 을지로/청계천 일대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가와 을지로/청계천 기술자의 친연성의 측면에서, 그리고 사실 그 후자를 표면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자기 연민이 전시와 맞물려 작업에 투사되는 것으로도 보인다.(*10) 이와 유사한 입장에서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심승욱 작가의 <누군가 떠난 자리 - 공간을 구성하던 것들의 변형>은 “곰팡이로 얼룩진 벽지를 모두 뜯어내 방 한 가운데” 둔 작업으로, 이는 이사 직전의 이삿짐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사람의 사라진 흔적과 함께 그것을 반출할 최후의 사람의 흔적이 예비 되어 있다. 을지로/청계천으로 이곳을 대입하자면, 젠트리피케이션의 동원 축으로 이용/전유되는 예술가의 지위가 그에 겹쳐진다. 따라서 앞선 두 작업은 앞선 예술가와 이 일대의 관계성을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작품에서 암시하는 예외적 사례들이지만(*11)(*12), 을지로/청계천이 예술가로 수렴되는 가운데, 예술가의 현실적 지위를 연민적 감응의 타자적 지위로 치환하는 데 그치는 듯 보인다, 물론 전시의 맥락 아래에서 보자면.

 

박원순 개인전 전시장 풍경, 사진_최철림

 

예술 바깥이 아닌 예술 내의 효과

이 전시는 결과적으로 여러 시사점을 남긴다. 사회의 이슈에 재빠르게 대응하는 예술의 가능성/한계뿐만 아니라 사회가 예술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그로부터 예술의 지위 역시 드러난다. 가령 가능성이라 하면 이러한 것. ‘예술도 사회를 직접 호출하고 그에 응전할 수 있다, 예술의 방식과 효과로써.’ 한계라 하면, 그 연장선상에서 예술은 사회에 직접 개입하는 대신 그에 대한 독특한 시점/관점을 갖는다는 것.(*13) 사실 이 전시는 전시 자체보다는 예술이 사회 내 어떻게 파급 효과를 갖는지에 대한 측면에서 예술계 내에서 이슈가 되었다고 보인다. 나아가 이러한 예술이 사회에 끼친 반향보다는 예술이 사회와의 경계를 (재)인식하게 될 때 겪는 효과가 이 전시의 진정한 효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14) 이는 곧 사회로 수렴되지 않고 예술로 수렴된다. 그럼에도 박원순은 분명 수신자가 되었음에는 틀림없는데,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굳건한 재개발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킨 것이다―사실상 그는 분명하게 응답한 것이다. 여기서 예술은 스스로를 반향시켰지만,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특이하게도 예술 특정적인 효과는 예술 바깥으로 나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예술은 여전히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걸 주지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대체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라는 언론의 반응은 이 전시를 무슨 논평의 매체쯤으로 전락시키지 않는가.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시는 사회상에 대한 빠른 응전이었고, 따라서 조금 더 긴 호흡과 거리로 현상을 맞닥뜨리는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셈이다. 몇몇 작업들은 실상 그냥 몇몇 작가들의 이전 작업들의 연장선상이라고 보였다.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을지로, 청계천, 이런 식의 이름을 짓는 대신 박원순을 거론한 건 분명 효과적이었고, 위트 있는 수사적 전략이었다. 이로써 사회와 공명하고자 한 부분 역시 의미가 있는 반면, 이 전시의 효과에 비춰, 실상 전시를 봤을 때 일어나는 그것과의 간극은 컸는데, 이는 물론 그 이름과 그 효과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파급 효과가 예술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보편적’ 굿즈(<UN-KNOWN.XYZ(미지수)>, 포스터)(*15)와 ‘한정적’ 굿즈(<겨울나기 이벤트>), 그리고 가상이지만 대중적인 포스터 홍보 등의 전략으로 더 많은 사람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사회 내에서 어떻게 위치하며 위치할 수 있을지는 이 전시를 통해 명확해지기보다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전시의 결과, 예술과 사회가 맺는 관계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귀결된다는 여전한 한계가 드러난 듯 보인다. 거꾸로 예술의 독특한 형식과 스타일로 생각되거나 주장되는 부분 역시 사회 내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단순하게 처리되는 것 역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고 오해될 수 있지만,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예술(가)이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가의 측면에서 이 전시는 시도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시는 박원순(과)의 소통에 대한 실패가 아닌 박원순의 불통을 적시해낸 측면에 대한 성공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시는 작가가 아닌 어시스턴트라는 이름을 쓴 것처럼 박원순을 어떤 식으로든 매개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어시스턴트라는 이름이 사회 바깥을 향하기보다는 사회 내 예술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은폐 전략에 가까운 것처럼, 예술을 예술의 바깥이 아닌 (사회 내) 예술로 위치시키는 기존의 전략을 취하고 있으며(*16),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전시 안에서 메타적으로 반추해 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이 전시를 통해 또 다른 타자로 응답하는 대신―그것이 정말 전시가 원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변형 가능성을 갖지 않는 전형적인 타자의 형상으로 고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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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전유’는 이 전시의 명명과 홍보, 그리고 전시장에 흐르는 주요한 방법이자 형식으로, 이 전시가 열린 전시장 이름인 ‘상업화랑’ 역시 그것이 상업적일 수 없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는 것 역시 이러한 예시가 될 수 있다.

*2) 즉 작가들은 투명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며 정치적 대변자가 아닌 작가적 지위를 고취하)고자 하는데, 이에 대한 예외는 이후 작업들을 살펴보며 제시될 것이다. 그리고 역시 뒤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관계성’은 을지로/청계천을 단순히 소재로 하느냐의 측면이 아니라 이곳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실제 반영되었느냐, 어느 정도 투명하게 드러나느냐의 여부에서 진단 가능한 부분이다.

*3) 하지만 언론의 반응과 언론에 대한 참여 작가들의 반응은 이 전시가 박원순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지어지는 듯 보인다. [“13”을 참조할 것!]

*4) 사실 이러한 은폐와 치환의 전략의 과정은 복잡해 보이지만, 다 박원순이란 이름을 호명/호출하기 때문에, 동시에 사회적 현상을 즉자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불러오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5) 대부분의 전시가 사실 예술계 내에서도 좁은 범위 안에서만 소비되고 유통된다는 것을 상기하자.

*6) 사실 이는 2018년 여름, 강북구 삼양동 내 한 옥탑방에서 약 한 달간 거주했던 박원순이 같은 해 겨울을 금천구에서 보낼 (연기된) 계획에 맞춰 준비된 것으로, (실제 받는 이에 박원순을 기입하기는 하지만) 박원순이라는 주체를 상정하기보다 서민 코스프레를 한 박원순에 대한 조롱조의 비판에 가깝다. 곧 박원순을 향하지만 박원순의 스웨그를 그와의 거리를 두며 재전유한다.

*7)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는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한 말로, 박원순 시장은 이를 올해 설날 연휴와 맞물려 언급하며 서울의 이후 행정 어젠다를 은유적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불도저식의 재개발 정책을 묘하게 상기시킨다.

*8) 물론 <UN-KNOWN.XYZ(미지수)> 역시 실제 2011-2019년 사이 박원순의 발언, 그의 물건 등을 수집해 디지털 이미지로 만든 것이지만, 이는 파편적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에서 목소리, 곧 현존을 즉각/강력하게 지시해내지 못한다. <UN-KNOWN.XYZ(미지수)>의 특이성이자 장점은 앞서 말했듯 그것이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9) 실제 잘 읽기 어렵고, 이는 혼란스러운 이미지-현실에 대한 부분에서 유래하는 부분이겠지만, 물론 작가로부터 의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0) “이 귤들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귤, ‘파치’라고 했다. 다 자라지 못한 밤톨만한 귤, 덩치가 너무 큰 사과만한 귤, 쭈글쭈글 시든 귤, 굴러 떨어져 터진 귤……” 작가는 파치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는데, 그 파치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다. 비판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라질 것을 보존하는 예술가의 또 다른 지위를 상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음 심승욱 작가의 작업은 부재를 현상하는 설치-사진, 곧 보편적인 예술의 효과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가 가리키는 사회적 맥락과 결부되면서 작업의 고유한 효과는 변용되어 드러날 수밖에 없다.

*11) 이 전시에서 언급되지 않은 유일한 작업인 차지량 작가의 글 <개인의 절망과 희망>은 전시의 작업들을 아우르는 서문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동기가 된 자신의 처음 작업을 언급하며 개인적인 관계성을 상정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시장의 작업들에 대한 거리를 두고 이를 아우르고자 한다. 그리고 이 거리는 작가가 사라진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감상적으로 비치는데, 이로써 이 전시를 대표하려 한다기보다 자신이라는 개인성, 그리고 이후의 관람객 저마다의 주관성을 노정하려는 듯 보인다. 이 전시는 제목, 작가가 없을뿐더러 엄밀히 말해 큐레이터도 없다—큐레이터가 아닌 코디네이터(로 재명명된) 차지량은 이 글에서 박원순의 어시스턴트가 아닌 작가들의 어시스턴트를 자처한다. 차지량이 작품들과 형성하는 거리는 내부자보다는 가까운 외부자의 것으로 보인다. 차지량이 이 전시에 부여하는 의미는 작품들에 대한 것이 아닌 그들을 동료로 형성하는 데 있다.

*12) 앞서 언급했던 한정림 작가의 작업은 어떠한가. 을지로/청계천 일대를 직접 보고 들은 기록을 옮긴 가운데 작가는 투명한 관찰자 역할을 자처하고자 했지만, 다시 전시장에서 그것을 지움으로써 덧대는 개입을 통해 심정적인 대입이 일어난다고 보인다. 결과적으로 물리적 시간과 육체가 과정으로 동반된 작업으로 이곳 일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관계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작업이라 하겠다.

*13)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예술의, 이 전시의 한계라 볼 수 있는 것인가. 이는 이 전시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의 부분에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이 명확하지 않다. 작가들의 말을 빌리면, 궁극적으로 이 전시는 박원순 스스로의 윤리적 점검, 곧 그 자신의 진정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박원순 개인전>은 박 시장 개인에 대한 조롱이나 분노 혹은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발칙한 전시의 제목과는 달리 진지한 태도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행정 수장인 박 시장에 대해, 기대했던 정치인의 현재 모습에 대해, 진보를 외치던 사람에 대해, 시민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도록 이상 징후를 감지하면 언제든 정확히 지적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전시 기간 중 박 시장의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그가 변화할 수 있기를, 그가 사회 곳곳에서 발현되는 중요한 가치들을 새로 업데이트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출처 링크) 하지만 진짜 작가들은 박원순 시장이 이 전시를 찾고 작가들과 현상에 대해 소통할 거라고 믿었을까. 아니 그것은 순전히 전략적인 수사였을까. 후자였을 때 이 전시는 단순한 의도를 벗어나서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박원순이 실제 이 전시장을 찾아 작가들과 대화를 시도하여, 작가들이 이 일대의 재개발 반대의 입장에 있는 공구상가 주인 혹은 기술자 분들의 입장을 온전히 대리/대변하는 매개자로서 유효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의 의문은 일단 차치하고. 사실 앞서 이 전시의 개별 작업들을 모두 살펴보았고, 그 결들은 모두 다르다. 어떤 작업은 박원순에게 직접 가닿고자 하지만(가령 한정림의 작업), 어떤 작업은 실은 박원순을 수신자로 배제한, 아니 배제해야만 성립하는 작업(가령 일상의 실천의 작업)이다. 그리고 이 전시의 작업들은 전자의 측면에서 현실에 대한 비극적 진단부터, 후자의 측면에서 현실에 대한 쿨한 태도까지 극단적으로 나뉘어 분포하며 이는 최황 작가의 말처럼 박원순과의 소통을 추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박원순 개인전’이라는 명명 자체가 유희적인 전략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후자의 측면에서 이 전시를 살피는 것이 더 맞는다고 보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원순 개인전이라는 명명은 박원순을 향하기보다는 박원순을 다루기 위한 우회적 전략인 것이다.

*14) 사실상 박원순 시장이 이 전시를 볼 수 있게 해야 했다면, 박원순이란 이름을 직접 쓰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그로써 전시의 형식은 달라지지 않을 수 있지만, 아마도 이 전시의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할 것이다.

*15) 그렇지만 수 천 장의 포스터는 전시 도중에 동이 났다고 한다.

*16) 포스터의 경우에 극명하게 그러한 전략이 드러나는데, 이 전시는 실제 지하철과 같은 공공 장소에 그 포스터를 거는 전략을 취하는 대신, 그렇게 되었다는 이미지 합성과 유포의 전략으로 그것을 가상으로 기정 사실화했다. 이것은 시도되면서 손쉬운 전략인 동시에 현명한/가능한 전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가짜, 곧 현실이 아닌 예술임을 천명하면서 드러났다. “#이거_다_합성인거_아시죠 #전시는_진짜”(사실 이러한 행위와 이미지 자체가 예술인데, 전시와 이 이미지를 진짜와 가짜로 분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전시가 예술계 내에 머물지 않고 사회 내 위치한다는 부담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필자_김민관

 소개_아트신(artscene.co.kr) 편집장.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아카이브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한편으로 예술(계)이 더 좋아질 수 있는 환경과 이를 위한 개인적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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