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퀴어연극제 <CAPA CITY> 과거와 함께

 

과거와 함께 춤을

<CAPA CITY> @퀴어연극제

 

글_권혜린

제4회 퀴어연극제의 4월 작품인 <CAPA CITY>는 SF 상상력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 상황에서 초능력자들이 처한 위기를 재기발랄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퀴어연극제는 모든 작품을 매달, 매회 참여자가 직접 창작‧제작‧공연하는 야심 찬 연극제로서 높은 능동성을 전제로 하는 만큼 배우들의 열정과 기대와 긴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한 시간 남짓 하는 짧은 공연이었지만 경쾌한 춤과 밝은 분위기가 어두울 것으로 예상했던 공연의 이미지를 반전시켰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공포의 대상이 현재의 전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트라우마까지 포함된다는 점에서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에도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에 과거와 화해하는 듯한 모습은 공연을 보고 난 뒤에 인물들처럼 시간 여행을 하면서 앞의 내용을 거슬러 오르게 했다. 질문들을 남겼기에 체감되는 공연 시간이 길고 여러 번 곱씹어 보게 했던 작품이었다. 제목인 <CAPA CITY>의 다층적인 의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도시는 어떤 겹들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 겹 안에는 과거의 기억들과 관계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그 봉인은 10년이 지난 뒤에 벙커 안에서 풀리게 된다.

공백 탈출을 위하여

2029년을 배경으로, 초능력자들을 소탕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벙커에 갇힌 네 명의 초능력자들이 극을 끌어 간다. 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벙커가 다른 무게로 느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극이 시작하면 빛을 받고 있는 나무 옷장 하나가 무대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인다. 이 옷장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외부와 차단되어 쥐 죽은 듯이 자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 안에 갇혀 트라우마를 갖게 하는 폐쇄된 공간이기도 하다. 곧 객석에 앉아 있던 배우를 포함하여 모든 인물이 무대로 튀어나와 자유로운 춤을 춘다. 붉은 조명이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하지만 곧 색색의 조명으로 바뀌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렇게 관객들의 긴장을 풀어 준 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스퍼 고등학교 동창인 네 명의 인물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0년 만에 벙커 안에서 조우한다. 또한 이들은 고등학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이색적인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말로 표현하는 것만 듣고 실제로 빵을 만들어 내는 브레드, 키스하면 음악이 나오는 키스, 울면 몸이 투명해지는 엠마, 영적인 능력을 지닌 영매 구온은 브레드가 소집해서 벙커에 오게 된다. 케이크가 먹고 싶어 열심히 설명하는 키스는 딱딱한 바게트만 만들어 내는 브레드에게 핀잔을 주기도 하고, 구온은 키스가 물 대신 가져온 와인을 마시고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고등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을 소환하기도 한다.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 티격태격하고 서로 걱정하고 챙겨 주기도 하면서 쉬는 시간 같은 분위기를 내다가 담임 선생님이 등장하자 긴장감이 흐른다. 담임 선생님은 ‘너희 자신에게서 구원받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숫자를 얘기하는데 이것이 벙커를 탈출할 수 있는 비밀번호라는 것이 밝혀진다. 게다가 번호를 한 번에 알려 주지 않으니, 믿을 수 있는 것은 구온이 담임 선생님을 통해 비밀번호를 하나씩 받는 것뿐이다. 

그러나 추리소설처럼 밀실에서 비밀번호라는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았던 초반의 이야기와 달리, 극이 진행될수록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벙커의 비밀번호가 아니라 과거의 비밀이 더 절실했던 것이다. 그들이 왜 10년 동안 공백을 만들어야 했는지를 밝혀야 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울지 않는다는 엠마의 말이 단서가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진짜 문제는 과거의 비밀을 추적하는 것이고, 문제 해결은 그 비밀을 풀어냄으로써 10년이라는 공백을 탈출하는 것이다. 예상 가능하듯이 과거의 비밀은 어둡고 내밀한 것이며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하기에 힘겹게 꺼내야 한다.

 2+2=∞

이들은 넷이 모였지만 ‘엠마-구온’, ‘키스-브레드’의 쌍으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의 과거가 이 두 쌍의 이야기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엠마와 구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구온의 과거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그림자놀이로 묘사되는 구온의 과거는 ‘Normal’을 강요하는 부모에 의해 벽장에 갇힌 삶처럼 드러난다. 구온이 폭력을 당하게 된 것을 옷장 속에서 목격한 엠마는 울면서 사라진 덕분에 옷장을 부순 구온의 아버지에게 발각되지 않지만, 투명해진다고 해서 목격자의 죄책감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구온과 춤추다가 들켰던 엠마는 구온이 맞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자신이 아무것도 못 했기에 슬프고 무서웠다고 말한다. 그 뒤에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고 구온의 집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역시나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고 엠마는 점점 눈물이 말라 울지 않게 된다. 그러한 사실을 10년이 지난 뒤에야 털어놓은 엠마에게 구온은 이제 울어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말랐던 눈물이 다시 나오게 된다면 더는 투명해지지 않게 되어야, 즉 초능력이 제대로 사라져야 홀가분해질지도 모른다. 

키스와 브레드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반전과 연관되어 있다. 브레드는 신부님이 되고 싶어 했지만 신학대학을 자퇴하는 바람에 가능성을 스스로 박탈한다. 이와 관련하여 벙커라는 장소 자체의 성격이 전환되는 것도 브레드의 폭로 때문이다. 브레드가 스스로 털어놓은 진실로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반전은 벙커가 사실은 평범한 지하실이며, 그 지하실이 있는 장소도 브레드의 집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브레드가 처음부터 벙커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지하실은 현실에서 신부님 되기에 실패한 브레드가 신부복을 입어 보면서 유일하게 꿈을 실현해 보는 소중한 곳이었고, 그렇기에 전쟁이 발생했을 때 동창들을 이곳에 초대하고자 한 것이다. 브레드의 폭로로 동요한 친구들이 비밀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자 브레드가 밝힌 비밀번호도 자신이 신부가 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던 담임 선생님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비밀번호가 함의하는 의미는 브레드와 키스에게 상극이다. 브레드에게는 은사인 담임 선생님이 키스에게는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키스에게 그 숫자는 잊을 수 없는 것인데, 고등학교 음악실의 비밀번호가 동일한 숫자였고 선생님이 음악실에서 「아베 마리아」 노래를 틀어놓은 채 키스를 추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키스는 1년 내내 음악실 청소를 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키스는 자신이 키스하면 노래가 나온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숨겼다. 그것이 바로 키스의 사라진 능력이 은폐한 비밀이었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자신의 상처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 능력인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비밀과 상처들이 드러나면서 갈등이 심화된다. 키스와 브레드가 밖으로 뛰쳐나가고 구온과 엠마도 지하실 안에서 불안해한다. 그러나 극은 두 명씩 갈라진 채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쌍이 합쳐졌을 때 그것은 단순히 4명이라는 숫자, 또는 집단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능력으로 나아간다. 무한대라고도 할 수 있는 최후의 능력으로.

최후의 능력, 그리고 남는 질문들 

또 다른 반전은 제목인 ‘CAPA CITY’, 또는 ‘CAPACITY’와 연관되어 있다. 이들의 사라진 능력, 은폐된 능력, 현재 사용되는 능력, 사용되지 않는 능력을 통틀어 가장 궁극의, 최후의 능력은 키스가 키스가 아니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키스의 또 하나의 위장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키스의 진짜 능력은 딱 한 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인 타임 슬립이다. 초반에는 이 능력이 시크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이 곧 키스의 능력임이 밝혀진다. 키스는 평생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이 능력을 기꺼이 사용한다. 덕분에 그들은 10년 전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그때를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렇게 기회와 가능성을 남긴 채 일종의 희망적인 상태로 막을 내리게 된다. 최후의 능력이 해결사가 된 셈이다. 

이렇게 모든 문제는 타임 슬립으로 해결된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질문들이 있다. 먼저 시간의 간극에 대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0년이 지났다면 29살일 터인데 인물들의 모습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것처럼 생기발랄하다. 이러한 명랑함은 10년이라는 간극을 느끼기 힘들 정도이다. 이것이 동창들을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시절처럼 회귀하는 것인지, 인물들의 성격 자체가 그러한 것인지 모호하다. 과거를 보여 줄 때에도, 마지막에 10년 전으로 돌아갔을 때와도 큰 변별점이 없는 것이 의도적인 연출일 수도 있으나, 초반에 10년 만에 만났고 20대 후반인 나이를 감안해서 서로 약간의 거리감이나 이질감을 보여 줬다면 나중에 타임 슬립을 했을 때 더 극적인 효과가 났을 것 같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 작품이 왜 퀴어 연극제의 작품일 수 있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외부의 재난인 전쟁이나 외부의 적이 가시화되지 않는다. 전쟁은 브레드가 자신의 대학 생활이 전쟁이라고 말하면서 은유적으로 말할 때 직접적으로 발화될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적이고, 무엇이 전쟁일까? 제목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CAPACITY’의 또 다른 뜻이 ‘수용력’이라고 할 때, 구온이 ‘Normal’이기를 강요당했던 것처럼 퀴어를 ‘특이한 것’이라고 치부하여 제거하려고 하는 이들, 생각들을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탕이라는 말로 배제의 대상이 된 이들은 초능력자로 그려진다. ‘특별한’ 이들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 색깔인 파랑, 노랑, 초록, 보라색처럼, 색색깔의 포스터처럼 이들의 능력은 무지개색으로 다채롭다. 

그러니 이렇게 수용력이 부족한 현실에서 남은 것은 최후의 능력이 보여 주는 가능성뿐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가능성이듯 과거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을 위해 키스는 단 하나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고마워하는 브레드에게 너를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과연 타임 슬립으로 키스의 상처가 치유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키스의 긍정성만큼은 이 작품에서 끝까지 빛난다. 이들은 벙커 밖으로 나갔으나, 장소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이동함으로써 ‘다시’를 산 것이다. 중간에 인물들이 십자가 대형으로 눕고 담임 선생님이 죄를 사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죄로 표현되었던 이들의 존재는 스스로를 다시 사는 것을 통해 자기를 구원한다. 엠마가 말할 용기를 내고, 구온도 엠마와 함께 가는 것을 선택하고, 브레드가 신부가 되는 것에 재도전하고, 키스가 진짜 은사님을 만나는 것. 따라서 과거로 가는 이유는 초능력이 아닌 자신의 ‘진심’을 담은 능력을 통해 제대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역시 춤이다. 최후의 춤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모두 함께 해방감을 드러내는 춤을 춘다.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함께 추는 춤을.

 *사진출처_퀴어연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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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http://blog.naver.com/grayhouse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