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없음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영원: 민수민정<생애라는 시간 너머>

2025. 12. 11. 22:01Review

 

없음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영원

민수민정 <생애라는 시간 너머> 리뷰

 

글_유경

 

어릴 적, 나는 내가 사라질까 봐 잠 못 이루고는 했다.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죽음의 상태를 상상하며 겁에 질렸다. 그렇게 되면 내가 사랑하는 것을 영영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몸이 자주 무거워지고는 했다. 나는 영원한 건 절대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알면서도, 동시에 자주 끝에 대해 무서워하고 슬퍼하는 겁 많은 어른으로 자랐다. 자꾸만 많은 걸 사랑하고, 나의 세상에 데려오고, 떠나면 아파하며 그 사랑이 없는 남겨진 삶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난 11월 아트포랩에서 발표된 민수민정의 <생애라는 시간 너머>는 내게 무척 무서웠던 ‘사라짐’을 재정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생애, 오히려 그 너머 영원으로 향할 수 있는 ‘없음’을 이야기해 본다. 생애라는 건 이 우주 속에서 얼마나 작은가. 생이 작아 자꾸만 외로워서 겁을 내던 나와 달리, 민수민정은 우리의 생애가 작기에 그 시간을 가뿐히 넘어서 본다. 죽은 이에게로, 사라진 공간과 지나간 역사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여정을 떠난다.

 

사진 : 이미지랩 플피, 제공 : 민수민정

 

처음, 無에 대해 질문하기

 

미디어아트 콜렉티브 민수민정은 어떤 경험 이후 남겨진 파편에 세밀하게 집중해, 거리예술의 형태로 풀어놓고는 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4 자유참가작이었던 전작 <GPS(Global Positioning Story)>는 그 집약적인 작품이다. 살고 있는 세계에서 배척당해 이방인이 되었던 사건 이후, 혼란스러움 속에서 마주한 여러 감정과 경험 속에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고,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며 함께 이방인이 된다. 아름다운 프로젝션 맵핑, 독특한 악기들, 인상적인 문장들, 카메라를 들고 뛰어나가기까지 감각을 주는 요소들로 가득 찬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번 <생애라는 시간 너머>는 이 모든 요소를 비운 채 태초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남겨진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보다, ‘남겨졌다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남겨진다’, 혹은 ‘남긴다’는 동사는 무언가가 ‘사라졌다’나 ‘지나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 질문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로 흘러간다. 전작에서 ‘지나간 다음의 존재’, 즉 남아 ‘있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민수민정은 이제 ‘없는 것’이 무엇인지 논한다. 동시에 무대 위에 있을 법한 것들을 하나둘 덜어낸다. 무대에는 스피커만 놓여 있을 뿐 배우도, 가수도, 연주자도 없다. 악기도, 마이크도 없다. 애초에 여기 무대는 없고, 단지 테이블과 노트북 한 대가 있을 뿐이다. 대개 무대 중앙에 서던 민수민정은 의도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구석과 무대 뒤에 있다. 그리고 나오는 것은 화려한 프로젝션 맵핑이 아닌, 흔히 프로젝터로 우리가 띄우는 한글 파일이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텍스트만 선명히 빛난다. 이야기의 화자인 ‘그’가 목소리 없이 말하기 시작한다. 저 낮은 천장에는 제비연이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다.

 

사진 : 이미지랩 플피, 제공 : 민수민정

 

수만 광년의 시간을 싣고, 남반구의 별빛이 묻을 때

 

6개의 음악 사이 텍스트와 이미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빛과 소리는 만질 수 없고 다만 느낄 수 있기에 빈 무대 속 시간과 공간은 허물어지고 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해도 괜찮다. 메일 창 안 같기도, 우주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그동안의 시간을 찬찬히 걸어본다. 

 

몸과 세상이 무거워 사라지고 싶어 하다가도 ‘내가 죽으면 그저 없어지는 것’인지 묻던 그는 친구의 죽은 동생의 흔적을 쫓아 떠난 여행에서 자꾸만 사라진 것들을 마주한다. 사라진 동네 골목, 나눠 먹던 떡볶이, 서교예술실험센터와 스튜디오 오픈셋, 전시관과 친구의 동생. 그 사이를 그는 계속 걷는다. 남반구에서 본 낯선 별빛은 이 사라진 것들을 하나둘 태우고 수만 광년을 달려 그에게 향한다. 그에게 빛이 묻을 때, 관객들은 그가 노래하며 들려주었던 맘모스 백화점과 잊힌 사람들1), 사라진 축제들2)이 이 빛에 올라타 있음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는 ‘모두 떠나갔는데 이상하게 무언가 남아있는’ 감각, 자신 안에 사라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받아들인다. 서서히 친구의 죽은 동생도, 어디선가 꼭 만난 것 같은, 아니 지금 함께 있는 듯하다는 온기를 느낀다. 그는 타인의 삶을 이어서 살아본다. 지긋한 슬픔의 끝에서, 그는 겪어본 적 없는 생애를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삶보다 더 더 오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이야기는 넓어져 간다. 

 

공연은 남반구로 떠나는 여행기로 시작하여 죽은 지인, 사라진 공간에 대한 얘기로 이어진다. ❘ 사진 : 이미지랩 플피, 제공 : 민수민정

 

 

애도를 지난 사랑시의 종착역, 영원

 

민수민정이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도, <생애라는 시간 너머>의 전반부도 마치 기나긴 애도를 닮았다. 사랑하는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긴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 애도다. 애도는 슬플 애(哀)와, 슬퍼할 도(悼)로 이뤄진다. 슬픔이라는 상태와 슬퍼함이라는 동작이 함께 담긴 단어인 셈이다. 민수민정의 작품은 대개 애(哀)에서 시작해 도(悼)로 향한다. 화자의 슬픔은 어느새 관객 내면의 일부를 울게 만들고, 이야기를 확장시키며 함께 슬픔을 ‘하는’ 순간으로 나아간다. 웅장해지는 음악, 우리를 삼키는 듯한 아름답고 커다란 맵핑까지, 우리 모두 함께 있다는 감각을 전한다. 이번 작품의 조각난 장면들 역시 그러하다. 몸살이 나도록 울고, 돌탑을 쌓으며 무언가를 기원하고, 아파한다.

 

하지만 <생애라는 시간 너머>는 이 애도에서 멈추지 않고, 영원으로 간다. 그는 계속해서 노래한다. 처절한 생존만을 외치는 세상 속 상처받은 이들이, 마침내 슬픔의 끝에서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하고, 슬픔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애도는 물성을 버린 순간 영원으로 향한다. 만져지는 이해가 아닌, 언어를 뛰어넘어 마음을 파고드는 감각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도, 존재의 유무도 뛰어넘는 이 영원은 우리를 멀리멀리 연결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건 없지만, 그렇기에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생애라는 시간 너머 함께 산다. 몸을 넘어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아주 유치한 사랑 같은 것. 나의 몸이 없어도 내가 주고 당신이 느낄 수 있는 사랑.

 



사진 : 이미지랩 플피, 제공 : 민수민정

 

<생애라는 시간 너머>를 통해 민수민정이 이제 하나의 챕터를 맺었음을 느낀다. 반짝이는 빛과 노래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예상처럼, 이 이야기도 환한 빛의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희망찬 엔딩으론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민수민정도, 우리도 자주 괴롭고, 때로 삶을 저주할 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입이 없어도 구전되는 이야기처럼, 너무나도 작은 우리의 생애를 넘어 사랑이라는 증언이 더 커져 나갈 거라는 걸 개운한 기분으로 알게 된다. 우리는 한번, 영원을 본 사람들임으로.

 

생애라는 시간 너머 함께 있기에. 나는 이제 더 많은 걸 사랑하기로 한다. 더 많이 사라질 테지만,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다. 민수민정은 이다음 장에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분명한 건, 나 역시 그 이야기를 구전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의 작은 생을 넘어 저 멀리까지.

 

 

 

1) 민수민정 맘모스를 잊는 시간(2022)

2) 민수민정 신촌투어:열리지 못한 축제들의 거리(2022)

 

필자 소개

유경 _ 쓰는 사람. 독립예술비평부터 소설, 연애편지와 이메일을 씁니다.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 있기를.

 

공연 소개

《생애라는 시간 너머》



일시 : 2025.11.01(토)-11.02(일) 17:00

장소 : 아트포랩(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신기대로33번길 22 지하)
공동연출 : 김민수, 이민정
작·음악·기획 : 김민수
미디어 시노그라피·그래픽 디자인 : 이민정
음향 믹싱 : 김용현
현장기록 : 이미지랩 플피
현장운영 : 아트 포 랩
 
제작 : 민수민정
주최·주관 : 김민수
후원 : 경기도, 안양시, 안양문화예술재단,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