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짭짤하고 눅눅하고 불투명한 채로 있기: 또모함 씨어터 <양기 가득한 학교 밖 청소년 (1인) 구함>

2026. 6. 29. 08:39Review

 

 

짭짤하고 눅눅하고 불투명한 채로 있기

또모함 씨어터 <양기 가득한 한교 밖 청소년 (1인) 구함> 리뷰

글_김송요

 

 

별안간 고백하자면 나는 청소년기에 내가 한 말에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있다. 약간이란 죄의 정도가 약해서라기 보다는 청소년기와 현재 사이의 시간적 간극이 감정을 희석한 결괏값이다. 열일곱 살에서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학교를 너무 좋아하여 졸업 무렵에는 맹랑하게도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글을 지면에다 쓴 적이 있다… (그런데 학교라는 제도의 편을 드는 것을 맹랑하다고 할 수도 있나? 직장 노동자로 치면 맹랑한 사 측?) 그 사실이 나를 얼마나 자주 괴롭히는지 실컷 말하려면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는 것은 자의식 팽창쇼일 것이다. 

 

…라고 말해 놓고선 그다음 문단에까지 끌어들이자면은. 요즘 종종 열몇 살 때 생각을 한다. 되돌아보면 그렇게 즐거운 일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친구랑 싸우고 혼자 학생 식당에 가기 싫어서 밥 굶은 날, 그 뒤로 아예 사이가 틀어져서 다른 반 친구들이랑만 밥을 먹었는데. 뭘 잘해서 우냐는 선생님한테 대든 날, 아무한테도 버스비 빌려달란 말을 못 해서 엄마랑의 서울 나들이에 늦고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며 혼자 걷던 길. 미술학원의 강남 사는 친구가 자기는 고등학교 서열 매기는 게 좋으니까 보수 교육감이 당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일, 나더러 그렇게 살지 말라는 익명의 문자를 누가 보냈는지 몰라서(지금도 모른다!) 울적한 마음조차 안 들고 조금쯤 무서웠던 밤. 

 

그 기억들이 새하얗게 휘발되는 것으로 모자라 미화된 까닭은, 자기방어이기도 하고 무지함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좀처럼 누굴 부러워하지 않았다. 내가 생득적으로나 스스로 애를 써서 갖게 된 것들이 최고도 최선도 아님을 알면서도 그 너머나 이상을 좀처럼 상상하고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상상이란 어느 한쪽 귀퉁이만 막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냥 나는 나 외의 또래가 사는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애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와서야 궁금증에 사로잡히고 만다. 다른 청소년들은 청소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 궁금증. 묶고 합쳐서 범주화할 수 없이, 백 명 있으면 백 가지 다를 이야기가 여전히 참 자주 궁금하다.

 

제공 : 또모함 씨어터

 

<양기 가득한 학교 밖 청소년 (1인) 구함>(이하 <양기 가득>) 속 학교 밖 청소년 다원과 유정은 ‘양기 많은 청소년’을 찾는 다원의 구인을 계기로 같이 살게 된다. 둘은 정이 많고 원–소원이든 원망이든지 간에–이 많고 내 친구 같은 애들이다. 재능이나 덕목을 찾아내어 구태여 칭찬하지 않아도, 때로는 그 속을 모르겠거나 조금쯤 얄밉더라도, 그저 그대로 사랑스럽기도 마음 가기도 하는 애들. 

엄마로부터 학교 밖은 물론 집 밖(눈 속에 들어간 모래처럼 걸리적거리는 표현이길 상상하면서, 감히 이렇게 쓰길 선택한다)에서 사는 것 또한 허락받은 다원. 다원은 유령 나오는 집에 살면서 손가락 같은 말단부가 투명해지는 경험을 하고,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처한다. 어쩌면 ‘데드라인’이 다가오면서 심화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다원은 구한다. 양기를 채워줄, 양기 가득한 학교 밖 청소년 유정을. 유정은 집 밖의 많은 공간과 장소를 서성여본 경험이 있고, 거기서 사람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떫은 맛을 보기도 했다. 상대를 유령보다도 희미하게 바라보는 시간과 고슴도치 딜레마를 지나서, 둘은 00한다. 두 글자로 된 아주 많은 것을! 

 

제공: 또모함 씨어터

이번 제3의집 에디션(?)은, 집이라는 극사실적 공간을 제외하면 외부의 일루전에 크게 기대지 않는다. 그만큼 고보민과 김은지 두 배우가 맡는 부분도 크다. 둘은 기호나 기능으로서의 ‘학교 밖 청소년’으로 표현되는 대신에, 숨소리가 들리고 살갗의 열기가 후끈거리는 인물로 존재하고자 한다. (관객과 배우 사이 물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기실 이는 비유가 아닌 그 자체로 맞는 말이기도 하다) 보조배터리가 되기에는 너무도 인간인 녀석. 내 생각처럼 야살스럽게 굴지도 않고 꿍꿍잇속이 있는 건 아닌지 긴가민가한 애. 그런 애들 둘이 여기 있다는 걸 믿게끔 만들어주는 힘이 두 배우에겐 있다. 누구여도 상관없는 내레이터이기 보다는 아주아주 구체적인 실존 인물이 되고자 하는 의욕이 전달되는 순간이 매혹적이다. 공연은 취향이 반영된 듯한 티셔츠나 거실 귀퉁이의 책들을 드러내놓고, 말투나 동작에서 전형성을 찾기보다는 두 배우의 캐릭터와 인물이 오돌토돌하게 노출되도록 한다. 비강 뒤에서부터 밀어내는 보민이나 뱃심을 써서 터트리는 은지의 발성, 툴툴대거나 버럭하기도 하지만 문장의 끝에 염려의 무게가 실린 두 사람 공통의 말투는 캐릭터에 위선도 위악도 덧씌우지 않고 입체감을 채운다. 

말의 ‘방식’이 주는 양감은 말의 ‘형태’를 통해 한결 구체화된다. 둘의 말은 독백으로, 방백으로, 대화로 이어진다. 혼잣말에서 주고받는 것으로 말의 방향이 바뀔 때, 어딘가 마침내 가닿는다는 것이 느껴질 때 그 말들은 관객을 향해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두 사람의 약간쯤은 건조하고 제법 축축한… 그러니까 눅눅한? 로맨스의 재현도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 이들이 그냥 학교 밖 청소년인가? ‘양기 가득한’ 학교 밖 청소년이다! 양기는 귀신 퇴치 목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레즈비언 로맨스로서의 짭조롬한 맛을 준다. 둘은 혐관(?)이다가 데면데면하다가 몸정(?!)도 들었다가 한식구가 되기도 하면서 서로를 향한 액션과 리액션을 충실하게 쌓아간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사랑에 빠지는 일을 과도하게 환상화하는 모습도, 그렇다고 사랑이 별 의미 없는 일인 것처럼 염세적으로 구는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그 점이 이 작품의 고요한 두근거림을 만든다. 그 의미에서 <양기 가득> 속 나만의(는 아니고 아마 많은 이들이 꼽았을) 명장면은 아무래도 귀청소 로맨스다. 섹슈얼하면서도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기도 한 행위.

사람이 싫은 시절과 마음을 꾸중할 깜냥이야 아니지만은, 그래도 가끔은 청소년이 묘사될 때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인간 싫어’ 일변도인 것이 영 아쉬울 때가 있다. <양기 가득> 속 이들은 인간을 조금쯤 좋아도 하고, 미워도 하고, 지겨워도 하고 의지도 하면서 사람답게 존재한다. 그리고 솔직히 내 생각엔 약간 성욕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 점이 좋다.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도 수많은 방식으로 사랑을 말할 줄 알았던 때, 사랑과 변태짓이 닭과 달걀의 우로보로스처럼 존재하던 시절이 그맘때라고 믿으므로. 

 

 

제공: 또모함 씨어터

 

또모함 씨어터가 포기하지 않고 가져가고자 하는 유머와 진지도 함께한다. 몸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서 <보디가드>를 방불케 하는 할리우드 액션이 수동 슬로모션으로 펼쳐진다거나, 분장이나 특수효과 없이 박력과 기세만으로 ‘손가락 사라짐 상태’를 연기해 낼 때 코미디 연기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공연 시작 전에 ‘소리를 내면서 웃어도 배우에겐 전혀 영향이 가지 않으니 편히 하시라’던 지구 연출의 호언장담이 실감난다. 아니 그리고 어쩌면, 그것들을 ‘코미디 연기’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건 부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픽션이 사실성과 허구성을 나란히 특징 삼는다는 원칙을 착실히 떠올리면, 이 작품이 그 둘을 끌어안은 채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유머 일변도라기 보단 결국 체온 정도로는 따뜻한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 

 

 

 

 

앞서 적은 ‘극사실 포인트’, 제3의집이라는 공간과 작품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도 이번 공연의 큰 요소다. 제3의집은 이태원 앤틱거리 허리쯤에 자리한 공간이다. ‘제3’이라고 하니 왠지 먼 위치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 소유도 네 소유도 아닌 비무장지대의 집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로변의 가게 사이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맞닥뜨리는 야트막한 주택. 공연 시작 전 다원은(그러니까 보민 배우는) 골목에 구인 전단지를 들고 나와 관객에게 건넨다. 작품으로 덥석 초대받는 순간이다. 

이번 공연에선 신발을 벗고 신발장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말하자면 거실-입구가 객석이 되었다. 캠핑 의자에 앉아 거실 복판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관람하고 있자니, 친구 집 놀러 와서 안방은 못 들어가는 예의 바른 손님이 된 기분도 들고, 집의 여러 칸과 틈이 무대로 또 객석으로 변모할 것을 상상해 보는 예비 세입자의 마음을 먹어보게도 된다. 이윽고 친구 집 손님이나 부동산 세입자치고는 약간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나 자신의 자세와 위치를 점검하면서, 이 공간이나 내 눈앞에 펼쳐진 두 인물의 화학작용보다도 집 거실에 캠핑 의자를 놓고 앉은 내가 더 생경해진다. 무대 위가 낯설어지는 게 아니라 관객인 나 자신이! 공연에서 지정한 두 사람이 ‘유령 나오는 위치’가 내 등 뒤 어드메라서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내가... 유령? 내 쪽으로 시선을 주지만 마치 심연을 보듯 나를 벗어난 이들의 시선... 이 공간을 채우는 건 양기 가득 1인, 학교 밖 청소년 1인, 그리고 유령 n명. 제3의집에 드리운 제4의 벽 너머에서 불현듯 이머시브적 효과를 느낀다.

제공: 또모함 씨어터

 

<양기 가득>에서 제3의집은 귀신이나 유령, 아무튼간에 망령이라고 부르기엔 실례되는 존재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곳으로 분한다. 수전에서 진짜 물이 흐르고 신발장엔 정말 신발이 놓인 이 집은 그러나 틈틈이 굉음과 쨍한 조도의 빛줄기에 노출되며 헌티드 하우스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꼭 거미줄이나 유령 그림자가 없어도 얼마든지간에. 공연은 보여주는 대신 상상하게끔 하면서 몰입감을 높인다. 반 층 아래와 반 층 위, 계단과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객석에서의 사각지대를 두 사람의 사생활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둔다. 관객은 그 너머로 가지 못하되 들을 수도 헤아려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거실 공간은 프로시니엄 무대로도 기능하는데, 상하수를 나눌 수 있고 그것과 대응하기도 불협하기도 하는 위아래가 있다는 점이–다락과 반지층, 문지방 너머 살짝 높은 지대 같은 방의 배치가 上과 下로 구역 나눔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생각지 못한 즐거움도 준다. 이처럼 제3의집은 관객의 앞지르거나 지연된 상상력이 끼어들기 적확한 공간 –공란이어서, 그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있어서 ‘다목적’이라는 목적에 가장 선명한 공간이 된다는 재미를 간직하고 있다. 

공연장이 이만큼씩이나 ‘집’인 덕분에, 이 공간이 정신적 쉘터나 생추어리의 은유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일면 맞으나 일면 틀리다고 결론지었다. 다원과 유정이 집을 떠나서도 집이 있(었)다는 데서 용기를 얻는다는 건 ‘바로 이 집’을 통해 심리적 대피소를 가지게 되었단 뜻이지만, 역설적으로 여전히 이들에게는 ‘바로바로 이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고 실재하였음을 긍정해야 한다고도 믿어서다. 

 

 

 

유령이라는 퀴어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유령은 다원을 투명하게 만드는 위협인 동시에, 그만큼 위협적인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원과 유정이 머물 곳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사라진’ 것은 아닌, 육체가 없는 존재의 과격한 틈입. 이미 유령에게 감정이입을 해서인지 마냥 꺼림칙하거나 거북하기보다는 어쩐지 가엾기도 하다. 유은정 감독의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나 장영 작가의 <키리에> 처럼 아름다운 작품에서 유령 입장에 몰두하는 법을 예습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들 작품에서 인물들은 유령이 되지만 원한으로 이승을 파괴하는 대신에 미래를 구출하는 과거로서 역할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A Haunted House>도 떠오른다. 이 짧은 소설 속에서 귀신 들려 맥동하는 집은 ‘Safe, Safe, Safe’ 소리를 낸다. 세상 따위는 빌어먹든지 말든지, 연인에게는 차라리 귀신 들린 집이 안전한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기 가득>에서 유령의 퀴어함이 두 청소년의 퀴어함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유령이 비가시화되어 없는 존재 취급받는 퀴어니스라면 둘은 기어이 살아남는 불투명함이다. 불투명함은 ‘여전히 눈에 보임’을 의미하기도 하고, 역으로 (에두아르 글리상이 말한 것 같은) ‘불투명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나도 그에게, 그도 나에게 모든 걸 ‘까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곁에 둔다는 말이다. 다원과 유정이 한 말 중에는 관객에게만 전달되고 서로에겐 전해지지 않은 것도 많(아 보인)다. 관객을 지나쳐서 둘 사이에만 벌어진 일들도 있겠지만, 그게 딱히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고백하고 캐묻는 건 아니었을 듯하다. 집이라는 곳이 그런 데고, 같이 산다는 게 그런 거겠지. ‘착한’ 방식으로 재현되길 요구받는 대안가족이나 극단적인 ‘가출팸’이 아니라, 충격적이거나 비일반적인 경험과 혼란을 말해야만 ‘진정성’을 인정받는 선입견적 퀴어함이 아니라. ‘투명해지길 요구하는 세상에서 불투명한 채로 있는’ 것이 이들의 식구됨이자 퀴어니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제공: 또모함 씨어터

 

글을 시작하면서 청소년 시절이 궁금하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청소년기를 동일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청소년기가 다른 청소년기보다 중요하거나 발화될/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유 그래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었다 내 얘기를 들어보련’하고 주체를 전환해버리는 건 싫다. 그럼에도 굳이 꾸역꾸역 내 얘기부터 한 까닭은, 어떤 이야기는 꺼내다가 떠오르기도 하고 풀다가 완성되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양기 가득>은 내게 그런 이야기였다. 내 한 시절을 소회하게도 고해하게도 소화하게도 만드는 이야기. <양기 가득>의 여러 층위 중 ‘청소년기’가 나의 서두로 온 까닭은 그 시절이 내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작품을 보며 ‘청소년기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넌 못해’라고 바리케이트를 치는 의도가 아니라, 반대로 ‘왜 못해?’라고 기만하지 않기 위해서다. 공연을 보며 새삼스레 인지한 것이, 청소년기가 엄마(로 대표되는 보호자)와 떨어지기 힘든 때라는 것이다. 다원과 유정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알아서’ 할 수 없는 시기에 느끼는 막막함과 당혹스러움 사이에서 주춤거리기도 한다. 그건 나도 익히 아는, 그래서 이 작품에서 시작한 이야기의 똬리에 말려들고자 할 때 입구 삼을 수 있는 마음이었다. 

 

단지 나는 이 말이 이 작품을 청소년기의 이야기로 읽어냄으로써 그 안에서 벌어지는 퀴어로서의 말과 행동, 상황과 감정들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술했듯이 모든 청소년기는 ‘다른’ 청소년기이고, 작중 다원과 유정이 겪는 감정의 부침이나 상황의 해결방식에는 당연히 정체성과 지향을 비롯 이들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에. 

 

이쯤에서 이어 말하자면… <양기 가득>에 대해 적기로 하고 계몽적인 말 혹은 예리한 척하면서 실은 너무 착한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재미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청소년 때도 교측(?)이었던 내가 갑자기 전지적 어른 된 척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을 소수자의 연대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주석이 잘못됐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건 아주 똑똑한 척 모든 것을 납작만두화하는 일이다. 그것보다는 퀴어청소년의 사랑이라고 말하면 조금 더 선명해지는 부분이 생길 것이다. 양기 가득한, 학교 밖 청소년, 집을 떠나 집을 찾던 둘이 마침내 사라지지 않는 방법을 알아내고, 이미 잠재해 있던 사랑을 꺼낼 수 있게 된다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눙치지 않고 뾰족하게 말할수록 갈쿠리에 효자손처럼(가출 효자 렛츠고) 걸려드는 마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틈바구니로 미끄러지는 은유와 경쾌와 우울과, 낱낱의 인간과 이야기가 있겠지만은. 그건 또 다른 사람이 건져내주면 된다고 믿는다. 

 

 

<양기 가득>을 보고 다시금 생각했다. 역시 나는 다른 것이 다른 채로 모여 생겨나는 징글징글 덩어리가 좋다. 모여든 이야기가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그냥 우두커니 손을, 아니 머리카락 한두 가닥 내민 상태이기만 해도 좋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도 아롱다롱 귀염둥이 키메라지만, 보는 사람 감정의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뭇 애틋하다.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의 머리카락 갈래갈래를 모아 땋듯이, 작품이고 그 안의 구성원이고 관객이고 할 것 없이 느슨하되 떼기 어려운 덩어리가 되어보는 일을 상상하게 한다. 불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불편하게 있는 걸 선택해보는 귀염둥이의 길을 제안해 준다. 덕분에 나도 그 길을 향해 뚜벅뚜벅 같이 걸어간다. 지각은 아니겠지!

 

 


필자 소개

김송요 _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을 항상 하고 싶어하고, 재밌는 일이 발생하면 꼭 끼고 싶습니다… 기획과 생산을 합니다…

 

공연 소개

<양기 가득한 학교 밖 청소년 (1인) 구함>



일시: 2026.04.03-04.12 (평일 19:30, 주말 15:00, 19:30, 4.12 15:00)
장소: 제 3의 집
작.연출: 지구
출연: 고보민, 김은지
조명: 서가영
오퍼레이터: 안정빈
기획/제작: 또모함 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