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11. 21:24ㆍFeature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 & <두리반 자립 음악회>
글|사이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
미납요금 때문에 인터넷이 끊겼네요. 덕분에 오랜만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름난 TV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기획했던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 부부가 함께 쓴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라는 책입니다. 아래는 두 사람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힌 머리말 부분이에요.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 무렵 미국과 구소련 사이에는 군비확장 경쟁이 한창이었다. 상호간의 억제, 위압, 자존심, 공포 등 갖가지 이유로 증강된 핵병기는 6만 기에 달했고, 양국은 일촉즉발의 상태에까지 치달았다.
한편 국내에서는 미국을 떠받치는 기반인 사회 하부구조가 붕괴되고, 환경이 열악해졌으며, 민주주의 제반 과정들이 전복되었고, 어느 곳에서나 부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자문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면 이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이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그래서 우리들은 핵 군비확장 경쟁의 정치적, 감정적인 기원을 파헤쳐보기로 했다. 핵 군비확장 경쟁의 가장 가까운 뿌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국민국가 대두의 결과로 발발했으며, 그 토대는 문명의 시발에까지 닿아 있다. 문명은 농경과 목축의 발명에 의한 부산물로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는 자연이 베풀어 준 풍부한 혜택을 인간이 채집하고 사냥하면서 살아가던 기나긴 시대가 있었다. 어느 시기인지, 어느 시점인지 명확하게 짚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인류가 오늘날 처해 있는 곤경의 뿌리는 바로 이런 과정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최초의 인류와 그들의 선조를 찾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오늘날 인류가 스스로 쳐놓은 올가미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등장하기 이전의 아득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알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직 반 밖에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은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한 과학책이면서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뛰어난 인문학 자료라는 느낌이 팍팍 옵니다. 누군가 내기를 걸자고 한다면 전 재산을 걸고 싶은 정도입니다(사실, 저는 인터넷 사용료도 못 내고 있는 형편이지만요^^).
자연과학이 밝혀낸 성과들을 토대로 생명이 진화해온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이들이 밝히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야지만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어떤 성향을 발전시키고, 어떤 성향을 경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선택의 순간에 섰을 때, 어느 쪽이 올바른 길이고 어떤 방향이 위험한 길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탐험을 해나가는 겁니다. 과연 이들이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요?
현실의 그림자
2010년의 현실도 80년대 못지않게 혼란스럽습니다.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뻔뻔스러워졌고, 상상력을 잃은 젊은이들은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안감 때문에 혼인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죠. 환경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끔찍하고 거대한 귀신이 온 세상을 홀리고 다닙니다. 뒤에 숨어서 정치를 조종하고, 청춘들의 꿈을 빼앗고, 예술에 깃든 영혼을 빨아들이는 이 귀신은 바로 돈(Crazy), 돈(Money)이죠.
귀신에 씌인 사람들은 대학을 직업훈련소로 만들고 음악을 한낱 ‘물건’으로 바꿔놓습니다. 용산 철거현장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것도, 이명박 정부가 4대강을 살린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바로 이 귀신에 홀린 탓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놈의 미친 귀신은 우리 주변 곳곳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요.
두리반
홍대입구역에서 동교동 삼거리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두리반이라는 식당이 있어요. 식당인데 밥은 안 팔고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음악회가 열립니다. 참 멋있는 식당 같지요? 그러나 이 식당이 밥을 팔지 않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귀신의 장난 때문입니다.
두리반이 위치한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마포구의 ‘지구단위 계획’과 인천공항과 연결되는 경전철공사 때문에 재개발 폭풍이 몰아친 곳입니다. 땅값이 치솟아 건물주는 귀신에 홀려 투기꾼한테 건물을 팔아 넘겼고, 귀신의 추종자인 투기꾼들은 다시 한국토지신탁에 팔아넘겼습니다. 덕분에 세입자들은 억지로 쫓겨나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지요. 당황한 세입자들은 ‘임대차보호법’에 호소해봤지만 법원은 ‘지구단위계획 지역은 쫓아내도 문제없는 곳일 뿐만 아니라, 영업보상도 할 필요 없는 곳’이라며 한국토지신탁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뭐 법이란 것도 결국 귀신이 만드는 거니까요.
막다른 길에 몰린 세입자들은 보상금이나 시설투자비도 받지 못한 채 하나 둘 떠났고, 마지막에는 두리반만 덜렁 남았습니다. 결국 200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한국토지신탁과 시공사인 GS건설이 뒤를 댄 용역들이 두리반을 덮쳐 집기를 들어내고 출입문을 철판으로 막아버렸죠. 그야말로 앞이 깜깜한 상황에서 안종려, 유채림 부부는 26일 새벽 두시, 절단기로 철판을 뜯고 들어가 무작정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전기도 끊겨버린 어둡고 차가운 그 새벽에 이들 부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농성을 시작한 지 백 일이 넘은 지금, 이들은 아직 '희망'이란 단어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긍정과 사랑
다시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입니다. 프롤로그에는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과학에 의해 밝혀진 새로운 지식과 과학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인간의 기원을 찾기 위한 탐험을 시작했을 때 우리 두 사람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발견될지 몰라 두려웠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럴만한 충분한 근거를 자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근거에 대해서 이제부터 설명해 나갈 것이다.”
아, 역시 칼 세이건 이었습니다(여기서 앤 드루얀의 이름이 빠졌다고 저를 남성우월주의자로 단칼에 베어버리지는 마세요. 단지 전에 칼 세이건이 쓴 <에덴의 용>을 인상 깊게 읽었고, 영화 <콘텍트>를 여러 번 감동하며 본데다가,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니까요).
도서관에서 이 프롤로그를 읽었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이 책은 바로 제가 그동안 부르짖어 온 ‘긍정과 사랑’에 대한 자연과학의 메아리였으니까요. 사실 제가 긍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고작 이 삼년 전이고, 이 책은 훨씬 이전에 출판되었으니까 오히려 제가 메아리라고 해야 맞겠지만요. 어쨌든 저는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영감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흥분해서 노트에 이런 저런 글을 옮겨 쓰기 시작했죠.
희망의 근거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생물의 흔적은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다. 원시 지구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빈틈없이 빽빽하게 달라붙어 살았던 세균들의 흔적. 원래 세균은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크기지만,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은 흔히 농구공만하거나 때로는 축구장 절반 크기나 되는 것도 발견된다고 한다. 약 36억 년 전부터 생명은 함께, 이웃과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던 게 아닐까?’
‘우리는 스트로마톨라이트 같은 초기 생명이 지금의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하나의 선조로부터 갈라져 나온 먼 친척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유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생물들 사이의 거리는 더욱 좁혀진다. 왜냐하면 유전자는 자기와 똑같은 유전자를 복제해서 자손한테 넘기기 때문에, 영화 <더 문>의 주인공처럼 유전자는 죽지 않고 다만 복제될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체가 단 하나의 생명이란 말이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제부터는 나와 남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진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전체 생물들의 DNA 염기배열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DNA 복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10억분의 1의 확률로 실수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런 실수가 자손에게 전달되어 고정되는 것을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철저하게 보수적인 생물 중에도 1백만 개체에 하나 꼴로 사태를 바꾸고 싶어 하는 급진주의자가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존의 양식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생존전략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그 1백만분의 1이다. 이런 혁명가야 말로 생명의 진화 방향을 결정하는 원동력이다."
‘DNA가 주인공이 되는 자연선택의 관점에서도 긍정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유전자에 기록된 긍정과 사랑의 명령어를 가진 개체들이 많이 살아남는다면, 그런 명령어가 다음 세대에 더 많이 전달된다면, 앞으로 인류는 그런 쪽으로 진화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더욱 더 떠들고 다녀야만 한다.’
"우리 인간은 타고난 특징 가운데 한 쪽은 키우고 다른 쪽은 억제시키는 효율적인 문화를 고안해 냈다. 인간의 본성에는 한 가지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지성이 인간의 특징이라면, 다른 종들이 각각의 장점을 살려 자손을 번창 시키고 유산을 후세에 물려주듯이 우리도 지성을 살려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분명히 불완전하며 최근에 생긴 것이다. 지성이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달콤한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든가, 그런 성향 앞에서 힘을 못 쓰거나 파괴되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향은 때로는 냉정한 이성으로 위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성이 우리의 유일한 칼날이라면 그것을 잘 쓰는 법을, 날카롭게 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그 한계와 결점을 이해하고 고양이가 발소리를 죽이고 몰래 걷듯이 또는 대벌레가 위장을 하듯이 생존의 도구로 지성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두리반 자립 음악회
지난 3월 27일에는 두리반 자립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제가 먼저 찾아가서 한 공연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가고 싶은 곳이 많아서 참 많이도 돌아다녔는데, 시골에 온 이후로는 뜸했죠. 지금 저는 거의 모든 공연에서 돈을 받고 노래하는 ‘귀농 가수’가 되어버렸죠. 홍대 전철역에서 내려 이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36억 년 동안 엄마를 잃은 고아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컵라면으로 함께 저녁을 때우며 유채림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처음에는 한 부부가 외롭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린답니다. 종교인들과 마포구 지역단체나 한국작가회의 사람들, 홍대 주변에서 음악 하는 뮤지션들과 그냥 ‘아무나’까지, 그러니까 귀신에 홀리지 않고 제정신인 사람들! 이들 덕에 지금 두리반은 한 주에 세 번 음악회가 열리고, 영화를 같이 보고, 함께 기도를 하는 멋진 곳이 되었답니다.
지금 두리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저항’이나 ‘싸움’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지만, 저는 이것을 유전자의 긍정, 혹은 그냥 미래를 향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본능은 어떤 감정이나 의식이 계획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겁니다. 원래부터 생명이 그렇게 생겨 먹은 거죠.
직업은 슈퍼백수로 전국을 다니며 노래도 부르고 글도 쓰며 아들 느티도 돌보며 산다.
'슈퍼백수'
'유랑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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