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9. 09:55ㆍReview
연극은 부대끼면서 계속된다
2017 산울림 고전극장 <카논-안티고네>
극단 작은신화 / 김정민 연출
글_권혜린
카논, 반복 그리고 차이
“그리스 고전, 연극으로 읽다”라는 주제로 상연된 ‘산울림 고전 극장’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카논-안티고네>는 연극에서 자주 반복되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룬다. 여기에서 카논은 ‘표준’ 혹은 ‘규칙’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안티고네>라는 고전이 현대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고전의 반복에는 변형이 함축될 수 있다. 고대의 인물과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의 목소리가 겹쳐지면서 오늘날에도 울림을 주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렀다가 형벌을 받는다는 줄거리는 유지하면서도, <안티고네> 연극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함께 보여주면서 고전을 변형하는 작업을 간접 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보통 관객들은 무대에서 ‘재현된 고전’ 혹은 ‘현대화된 고전’의 결과물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고민들을 알기 어려운데, 메타연극으로서 연습 과정을 보여주면 고전을 무대에 올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것뿐만 아니라 왜 고전을 올려야 하는지까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동(共同)으로서의 연극
무대는 배우들이 <안티고네>를 연습하는 첫날의 장면에서 시작된다. 배우들이 나란히 앉아 대본을 낭독하는 장면에서는 관객의 오감이 배우들의 목소리와 표정에 집중된다. 지배자에게 복종하고 분수를 지키고자 하는 이스메네는 유약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와 표정을, 인간의 법이 아니라 신의 법을 지키면서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안티고네는 의지적이고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대본을 낭독할 때 코러스 역할을 하는 배우에게 시선이 집중되며, 그 배우의 연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는 그 배우가 막내이자,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정보가 첨가되면서 ‘분위기 메이커’로 나타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처럼 낭독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반응들도 연극에 포함되면서 연극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또한 연출가가 오이디푸스에 대해 태블릿으로 설명하고, 작품에 대한 생각들을 배우에게 물어봄으로써 연극에 대해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과정들이 중요시된다. 다양한 이야기들 중에는 뒤풀이에 대한 의견이나 배우들에 대한 의견 등 사담과 농담도 있다. 그러나 이 잡담들까지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 포함된다. 함께 연습하면서 극을 만들어나갈 때 ‘분위기’도 중요한 요소에 해당하며, 공적인 말들과 극 속의 관계와 배우들의 실제 관계들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이는 연극이 어디까지나 공동(共同)의 작업이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연극도, 삶도 부대끼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 <카논-안티고네>에서 잘 드러나는 것은 ‘갈등’이라는 주제이다. 극 속에서 연출가는 원작에서는 운명을 중시하지만, 각색된 작품에서는 인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안티고네의 이야기부터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했던 안티고네는 나라의 안정과 국민의 단결을 위해 특히 여자로서 침묵하고 순종하기를 바라는 크레온과 대립된다. 이는 법을 위반한 일이 한 인간으로서 한 일이지, 여자로서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안티고네와 대립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연습 장면에서 크레온과 안티고네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크레온이 마치 안티고네를 심문하는 듯하지만, 안티고네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게다가 여기에 안티고네 역할을 맡은 배우가 버스에서 여성으로서 겪었던 불쾌한 경험이 더해지면서 연기에 삶이 실린다.
또한 선후배 간의 위계에서 나오는 갈등, 남성과 여성의 갈등, 나이로 인한 갈등 외에도 역할에 대한 갈등이 나타난다. 갈등은 서로 부대끼는 과정이기도 하다. 막내인 배우가 코러스, 예언가, 파수병으로서 1인 3역을 맡아 대사와 비중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하이몬과 비교된다. 그러자 하이몬을 맡은 배우는 연습 때 할 일이 없어 이럴 바에야 알바라도 할걸 그랬다면서 연출가에게 불만을 표출한다. 연출가가 과자 심부름을 이스메네에게 시키자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며 이스메네 역할을 맡은 배우가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렇게 갈등은 배우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배우와 연출가와의 관계로까지 번진다. 연출가가 첫 연습 때 자신의 역할이 가진 갈등에 대해 생각해 오라고 숙제를 냈었는데, 그 숙제들이 연극 연습이라는 실제 삶에까지 침투하는 것이다.
갈등의 범위는 고전을 변형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현대적으로 각색하면서 연출가는 모든 배우들이 반말을 쓰도록 연출하는데, 이는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감정을 갖지 않고 논리적으로만 부딪치는 것’이 의도였다. 그러나 하이몬과 크레온은 부자(父子)가 존댓말을 쓰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다. 결국 존댓말로 다시 대본이 바뀌고, 연출가도 점점 예민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연극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부대껴야 하는 부분이다. 부대낌은 끊임없이 서로 접촉하며 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파수병에서 코러스로 어떻게 넘어가는지 배우가 물어볼 때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고, 초월적으로 연기하라는 연출가의 답변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곧바로 소화하기 어려워하는 등 연기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크레온에 대한 평가에서도 토론이 이루어진다.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할 때 크레온은 악역일 수도 있고, 나라의 안정을 중요시한 통치자일 수도 있다. 또한 ‘모두에게 착한 사람,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 모두가 칭찬하거나 욕을 하는 사람’으로 범주를 나누었을 때 국민에게 좋은 통치자가 되고 싶었던 크레온은 모두에게 착한 사람으로서, 소통 불가 상태에 있다가 약자에게 폭발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렇게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도 캐릭터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며, 갈등이 생겼다가도 금방 종이컵으로 제기차기를 하는 등 서로 부대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드러난다. 이렇게 연극 연습이라는 삶과 연극 속 역할이 서로 부대끼면서 연극은 점점 완성되어 간다.
그리고 연극은 계속된다
이렇게 연습이 마무리되고, 현대적인 의상까지 갖춘 배우들은 연극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바위 산 세트가 등장하면서 현대에서 다시 고대로 돌아가는데 연출가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안티고네는 촛불을 들고 대사를 한다. 크레온이 자신의 아집 때문에 예언자의 말까지 무시하고 자신의 독단을 밀어붙여 안티고네, 하이몬, 왕비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자 배경에 걸린 달 그림이 핏빛 달이 된다. 예언이 실현되면서 스스로 불러일으킨 핏빛 달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알았을 때 난 진정 고독해졌다”고 했던 크레온의 말처럼 연극은 크레온의 고독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객석에 앉아 있던 연출이 마지막으로 불을 끈 뒤, 연습하는 영상을 틀어주면서 막이 내린다.
그러나 영상을 다 본 뒤에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왠지 연극이 계속될 것 같은 기분, 혹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비록 마지막에 강렬하게 나타난 크레온의 연기가 완결의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극이 연습 장면이었고 진짜 연극은 지금부터 시작일 것 같았다. 이렇게 서로 부대끼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연극 역시 극 속에서도 부대낌을 보여주며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부대낌’이라는 거친 단어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쩌면 고전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변주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작품이었다.
*사진제공_산울림 소극장 >>> https://www.facebook.com/theater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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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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