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청소년 희곡집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

2017. 12. 27. 16:27Review


여섯 가지, 그리고 세 가지 질문들

청소년 희곡집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

김슬기-이오진-허선혜 

글_권혜린


청소년기를 한참 지난 지금 청소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련하지만,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희곡집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를 읽으면서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사랑이나 진로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는 절실함을 갖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질문을 절실하게 사는지가 관건이며, 청소년들의 질문이라고 해서 중요도를 낮게 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희곡집에 실린 여섯 편의 작품들은 여러 질문을 담고 있었으며 단막극 「후배 위하는 선배」, 「남자 사람 친구」, 「먼지 회오리」, 장막극 「자존감 도둑」,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 「햄스터 살인사건」은 크게 사랑이라는 감정, 인생과 진로에 대한 불안, 탈출이라는 환상이라는 3가지 색으로 읽혔다. 그 안에서 잘게 나뉘는 감정들의 결이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머물렀다.



사랑은 어른의 전유물이 아니다

청소년기에 가장 크게 요구되는 역할은 학생이며, 공부라는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습에 대한 기대효과는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학습할 수 없기에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사랑을 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어른에게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성(性)과 결부되는 문제일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에서는 성교육처럼 공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외에는 음지처럼 여겨지는 청소년의 성(性)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 나오는 어른도 완벽하지 않다. 성(性)과 관련된 상담을 어설프게 하는 교사 선아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노을의 언니 가을이 노을에게 완벽한 신뢰를 주기는 어렵다. 친구인 수미가 안 좋은 소문 때문에 힘들어하고, 마찬가지로 친구인 명과 노을이 서로 좋아하고 있지만 거리를 좁히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노을은 수미를 “이상하게 보는 게 이상한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너의 편이 되겠다고 이야기하고, 명은 노을에게 지금 함께 있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서로의 거리를 좁혀 가는 과정은 외부에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내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서로를 마주 보고, 손을 잡는 그 ‘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하더라도.

「남자 사람 친구」는 지아와 영래의 감정에 집중하여, 실질적으로 거리를 좁히면서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의 떨리는 순간들을 담아낸다. 메시지의 내용과 전송해야 할 시간 간격까지 생각해서 메시지를 썼다가 지우며, 상대방에게 보낼 메시지 하나에도 온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 마음을 간질이는 듯하다. 지아는 자신과 영래의 사이에 있는 나애를 견제하면서 설렘과 질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두 사람은 각각 집과 여행지에 있어 물리적인 거리가 있지만 서로에게 집중하는 과정을 통해 둘만 보는 약속을 잡는 데 성공한다. 친구 이상의 사이로 나아가는 것이 어색할 수는 있지만 서로를 계속 생각하면서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두 사람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마음도 깜박깜박하는 순간” 두 사람을 무조건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른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이 작품에서도 영래의 누나, 영래의 부모님, 영래의 사랑은 동일 선상에서 다채롭게 다가왔다.



현재 진행형의 방황들

다음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방황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먼지 회오리」는 운동장에서 일어나는 먼지 회오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내면에서 불어 닥친 돌풍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회오리에 휩싸이는 순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등나무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던 정연은 먼지 회오리가 멈출 때까지 선생님과 야자타임을 하거나 함께 노래하기도 하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 호진과 샤프심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호진에게 방송으로 랩을 하게 시키기도 한다. 그 랩을 들으며 실컷 운 뒤에야 먼지 회오리가 멈추고, 시계를 본 정연은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고 보여도 무심하게 지나칠 먼지 회오리는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잠시 유예하고 방황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정연의 친구인 희정과 진은 먼지 회오리에 관심이 없지만 그들도 가슴 속이 답답하고, 이유 없이 난리 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읽으며 학창시절에 억압당하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작은 방법이 고작 학교 내부에서 소박하게 노는 것으로만 이루어졌던 것도 생각났다. 운동장에서 잠시 생겼다 지나가는 먼지 회오리처럼 이러한 회오리는 가슴 속에서도 잠깐 스쳐 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외면만 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정연처럼 회오리를 한없이 바라보며 뭐라도 해야 돌아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후배 위하는 선배」는 통상 ‘대학에 가면’ 다 해결될 거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주문이 무기력한 속임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학에 가면 나를 둘러싼 세계가 변혁적으로 바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질감과 색깔을 지닌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교에서 유일하게 상위권 대학에 간 우연이 ‘선배와의 대화’ 시간을 위해 모교를 방문하는데, 사실 우연도 학과가 통폐합 위기에 처해 불안한 상황에 있다. 학생들도 강제적으로 참여한 데다 가정형편 때문에 자퇴를 생각하는 신기한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신기루, 만화를 좋아해서 일본 유학을 생각하는 계구봉, 자해를 일삼는 이지은, 뷰티 블로거나 유튜버를 꿈꾸는 김신혜 등 대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렇게 선배와의 대화 시간 자체가 무시를 당하자 좋은 대학에 갔다는 성공을 과시하고 싶었던 우연은 결국 폭언을 하고, 학생들 역시 대학의 신성성을 깨는 질문들을 우연에게 던진 뒤 교실을 나간다. 마지막에 기한이 우연의 알 없는 안경에 손가락을 넣는 것 역시 학생들을 ‘꼴통’이라고 욕하면서도 ‘후배 위하는 선배’ 역할을 연기하려고 했던 우연의 허위를 폭로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자존감 도둑」은 친구 아닌 친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유리와 옥 사이에, 독단적인 아버지에 반항하여 동생을 때리고 홧김에 가출한 지원이 끼어들면서 벌어지게 된 하룻밤의 조우를 그린다. 겉모습도, 성격도 다른 유리와 옥은 붙어 다니기는 하지만 유리가 옥을 ‘오크’라고 부르면서 평소에 무시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은 균열을 내재하고 있다. 오히려 같은 학원에 다녔지만 옥과 친하지 않았던 지원이 옥에 대해 더 잘 알고, 옥을 이해하는 말을 한다. 셋은 함께 맥도날드, 분수대, 노래방, 오락실에 들르고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아지트에서 술을 마신다. 그러면서 결국 본심을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아버지가 억지로 규정한 남자다움에 반발한 지원은 옥과 유리의 가장(假裝)된 관계도 수면에 드러나게 한다. 옥 역시 이에 동조하면서 친구인 척을 그만하자고 이야기하고 유리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들의 모임은 그대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뚝방 정자에서 해가 뜨는 것을 함께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존감을 도둑맞은 것처럼 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원은 한 번 사는 것이니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유리 역시 지원의 생각을 인정하면서 세 사람의 사이는 해 뜨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누그러진다. 해가 뜨면 지원은 집으로 돌아가고 유리와 옥의 관계도 완벽한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절실한 대사들을 보면서 그들이 모두 자존감의 주인이 되기를 저절로 바라게 되었다. 



돌파구, 또는 탈출이라는 환상

그런가 하면 현실을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를 환상으로 드러낸 「햄스터 살인 사건」 같은 작품도 있다. “너무 좋은 방에 가면 다시 살고 싶어지”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마지막 순간을 위해 허름한 모텔 방으로 들어온다. 남학생은 손에 햄스터 우리를 들고 있다. 극한 순간에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는 등 내부에서 파국을 일으키는 햄스터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상황을 은유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소에서 마지막 순간을 조용히 맞이하려던 남학생과 여학생의 바람은 배관공의 침입으로 깨진다. 학생들이라고 무시하던 배관공과 집주인은 우리 안에서 평화롭게 있고자 했던 햄스터를 살인하려는 이들과 다름없다.

이에 대한 반항은 환상으로 나타난다. 창밖으로 떨어진 여학생은 온데간데없고, 남학생은 여학생과 햄스터를 동일시하는 대사들을 한다. 급기야 배관공이 햄스터를 밟아 죽이는 진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엉겁결에 오게 된 경찰까지 배관공, 집주인과 방에 갇힌다. 그리고 그들은 총을 들고 위협하는 남학생 앞에서 햄스터의 제사를 지내게 된다. 한 편의 풍자극처럼 당연히 제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연기하는 이들 앞에 여학생이 다시 나타난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 여학생이 남학생의 총을 뺏고, 여학생을 말리려던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가 여학생이 사라진다. 남학생도 주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면서 죽는 것만큼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겠다며 사라진다. 남은 것은 죽은 햄스터뿐이며, 우리에서 동족을 잡아먹는 햄스터뿐이다. 마지막에 남은 “몽환적인 타악기 소리와 서글픈 현악기 소리”는 꿈과 현실이 뒤섞인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는 환상이 억압적인 현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더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남학생과 여학생도 사라진 게 아니라 여전히 남은 것이다. 이들을, 햄스터를 죽인 것은 과연 누구일까? 마지막까지 여러 질문을 남긴 작품이었다. 




*출판사 제철소 SNS 페이지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pg/from.rightseason


필자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책소개_


제철소가 펴낸 세 번째 청소년희곡집. 청소년의 섹스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를 비롯해 「후배 위하는 선배」 「먼지 회오리」 등 단막극과 장막극 각각 세 편씩 총 여섯 편의 청소년희곡을 담았다. 특히 단막극 세 편은 ‘ASAC B성년 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지난해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라 많은 청소년 관객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대학로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세 명의 젊은 극작가가 참여한 이번 희곡집은 작품마다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뽐낸다. 진짜 나답게 사는 일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자존감 도둑」,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반드시 찾아오는 열병 같은 순간을 그린 「남자 사람 친구」,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햄스터 살인사건」 등을 통해 연애, 섹스, 자존감, 죽음 같은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불편한 물음’들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저자소개_


김슬기_1986년 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등단했다. 지금까지 「미성년으로 간다」 「크레센도 궁전」 「김치녀 레볼루션」 「페미 리볼버」 등의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페미니즘 연극과 청소년극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으며, 페미니스트 극작가 모임 ‘호랑이기운’의 멤버이자 페미니스트 공연팀 ‘젠더리볼버’ 대표로도 활동 중이다. 청소년희곡집 『B성년』(공저)을 펴냈다.


허선혜_1991년 겨울 안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주최한 제1회 청춘나눔연극제에서 희곡 「햄스터 살인사건」으로 대상을 받으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청소년희곡을 쓰며, [오문오방 프로젝트] [시어, 헤엄치다] 등 문학과 연극을 매개로 한 대안 공연에도 참여했다. 현재 소규모 창작 그룹 ‘나비꼬리’에서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이다. 공연의 모토를 ‘교감’으로 삼고 그것이 최우선 되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오진_1986년 가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공교육 시스템을 비꼬는 희곡 「바람직한 청소년」과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 희곡 「오십팔키로」에서 청소년을 담았다. 2016년에 대산창작기금을 받았으며, 희곡집 『연애사』와 『B성년』(공저)을 펴냈다. 현재 페미니스트 극작가 모임 ‘호랑이기운’에서 활동하고 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어디서나 올릴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다.


목차_


*단막극

후배 위하는 선배

작가 노트

남자 사람 친구

작가 노트

먼지 회오리

작가 노트


*장막극

자존감 도둑

작가 노트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

작가 노트

햄스터 살인사건

작가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