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3. 12:10ㆍReview
냅킨 한 장짜리 지도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
글_ 끌로딘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편재하지만, 파편화된 생존자들의 두려움은 자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방식으로만 말해지고 결국은 자기 자신에 의해 깊숙이 묻혀야만 했다. 그래서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라는 이번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슬로건을 보면 즉각적으로, 여성 인권과 관련한 제 문제를 다룰 때 근본적으로 구조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개인들을 굳이 한눈에 담기를 고집하여 도리어 시야에서 흐릿하게 지워버릴 때 우리의 고민들은 출발했던 지점이자 결국에 도달해야 할 지점을 잃어버린다. 이 슬로건은 제각기 다른 모양의 상흔을 품은 그 한 명 한 명을 보듬으며 속삭이듯 전하는 치유의 메시지다.
이곳에서 만난 몇 작품들이 담아낸 속삭임들을 때론 비적비적 뒤집어가며 때론 말없이 나란히 따라 걸어보았다. 그리고 그 걸음들이 마주치는 지점들을 아래와 같은 지도로 헐겁게 엮어보았다. 저마다 달랐던 그들의 이야기들은 놀랍게도 냅킨 한 장에 담긴다. 그것은 아마 이 지도가 교차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일 테다. 제멋대로 짧거나 긴 이 따라-걸음들을 즐겁게 혹은 골똘히 함께 훑어주셨으면.
가족 계획
박성진 2010
폭력이 일상적으로 오가는 이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과는 달리,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지민의 새언니가 가장 ‘전통적인’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해내려 애쓰는 모습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그것은 도달 불가능한 정상 가족의 이상에 끊임없이 구애하는 우리들의 초상이다.
앵그리 맨
http://indienbob.tistory.com/419
버팔로
조안 허쉬필드 2007
태국의 가정폭력이 전혀 새롭지 않았기에, 뒷맛이 더욱 개운치 않다. 제한된 상영 시간 내에서 선별된 사례들은 일정한 대표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소개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를 변호하는 논리로 이용되곤 하는 정황들이 등장했을 때 불편했던 느낌까지 더해야겠다.
괜찮아
김성철 2009
여름 막바지 개학을 맞은 학교의 어느 체육 시간, 체육복 대신 교복, 그것도 춘추복에 터틀넥 풀오버까지 겹쳐 입은 아이가 있다. 공개적으로 ‘복장 불량’으로 호명되는 유리의 비정상성irregularity은 곧 유리 가정의 ‘비정상성’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그를 살해하고 유리마저 죽음으로 몰았던 어머니가 있는 그 가정을 사회는 공식적으로 결함으로 지칭한다. 지금 이곳에 있게 된 조건을 들여다보기 전에 우선 그 흉측한 표피를 즉각적으로 수정하고 다른 보통의 무리와 균질화해야 할 것으로서, 결함은 불러내어진다.
무리에서 골라져 운동장 트랙을 뛰는 유리에게, “같이 가”자고 뒤따라오는 어머니―자신의 목을 있는 힘껏 조르던―는 본질적으로 “천천히 와”라는 말을 남기며 총총 앞서가는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 내내 감정을 내보이지 않던 유리가 운동장에서 터뜨리는 울음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임의로 처분하려던 것과는 별개로 깊은 애도의 절차다.
그리고 비로소 홀로 터틀넥 속을 들추어 보는 유리. 그러나 가리려 애썼던 그 짙고 검푸른 흔적은 정작 자신에게만 보인다. 그 상처에 각인된 기억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치열히 상기될 것이고 매번 싸워야 할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주할 줄 알아야 한다. 살아남은 그가 앞으로 ‘천천히’ 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상흔과의 대면이다.
가족계획, 박성진, 2010 버팔로, 조안 허쉬필드, 2007 괜찮아, 김성철, 2009
수진들에게
강연하 2009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서 장 보기가 장래희망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모노그램들이 번쩍이는 디자이너 브랜드 매장 사이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면, 분명 생활을 위한 장소임에도 생활과는 동떨어진 그 곳이 있다. 위층의 연장선상에서 여전히 적절한 한산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은 그 곳을 지키고 선 것은 같은 색의 치마를 입고 같은 복도를 걷는 그들이다.
수진은 모노그램이 박힌 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시식 코너에서 조리를 준비하고 있다. 백을 든 아가씨가 수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본다. “오늘은 만두 하시네요?” 수진은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이내 판촉을 시작한다.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익명의 무리에서 수진을 잡아채내는 행위, 지극히 개인적인 관여의 제스처. 반면 매장 비상계단에서 다른 직원들을 대하는 수진은 그러한 개인적인 관여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 그들의 개인사를 듣거나 묻지 않고 애착을 거둔다.
박스를 창고에서부터 나르는 걸음걸음이 무겁다. 회사 내에 괴담같이 떠도는 정리해고 소식에 삶의 기초가 휘청거리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나날들의 무게를 수진은 스스로 부정한다. “그건 애들이 열심히 안 살아서 그래.” 그가 다른 직원들과 심적인 거리를 두는 법은 그러한 개인에의 귀인 외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상부에 그들의 언행을 보고하고 정리해고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그들과 거리를 유지할 때 수진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생존할 수 있다. 비정규직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고 그들의 연대를 끊임없이 와해하려는 자본의 의지는, 수진이 스무 살 전에 가졌던 꿈과 그 이후 삶의 무게 사이의 괴리 앞에서 반드시 비가시적인 양 다루어야만 할 어떤 것이다.
일과가 끝나고 윈도우 쇼핑을 하며 짐짓 옷을 입어만 보던 의류 매장에서, 모노그램 백을 들고 있던 아가씨가 직원으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내밀었던 사적인 관여의 제스처는 바로 자신과 닮은 존재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앞에서 옷을 계산한다. “일시불이요.” 여전히 자신이 짊어진 무게를 부정해야 하는 그들은 모두 수진들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같은 버스를 탄 그들. 의류매장 직원이 식품매장 직원에게 묻는다. “어디까지 가세요?” 버스의 목적지는 뻔하고, 수진은 답하지 않는다.
하는 일과 옷은 바뀌었어도 그들은 같다. 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 정류장에서 다급히 내리는 한 여고생. 미래의 수진을 바라보는 수진들이 담담히 묻는다. “알았어요? 스무 살 넘어서 이런 삶을 살고 있을 줄.”
910712희정
유원상 2010
실명―있을 법하게 지어진 것일지라도―을 타이틀에 쓰는 작업은 <수진들에게>에서도 보여지듯, 뭉뚱그려지기보다 각기 비죽비죽한 개인의 경험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주는 힘이 있다. 제목의 여섯 자리 숫자는 감독이 밝혔듯 마치 수인 번호처럼 다가온다.
희정에게 세상은, 도로를 질주하는 덤프트럭, 처음 가보는 동사무소의 풍경, 동사무소 안에 장애물처럼 놓인 사다리,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는 희정을 집요하게 뒤따라가며 핸드헬드로 촬영하는 화면의 일렁임과 같이 낯설고 불안하며, 심지어 위험을 잠재하고 있기까지 하다. 두리번거리며 동사무소에 들어가 돌아다니며 이방인처럼 곳곳을 살펴보던 희정은 몇 번 주저하다 마침내 창구에 이른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서는 학생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랬다. 우리는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오래 전부터 이미 기록되고 관리되고 있었으며, 생애주기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신분증명들 사이 손에서 손으로 넘겨받아지는, 언제까지나 추적 가능한 존재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희정의 학생증과 주민등록증의 다른 점은 바로 지문 날인이다.
처음에 희정은 손을 ‘다쳤다’고 말한다. 실은 별로 적극적으로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데, 이는 애초에 그럴 필요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자꾸만 손을, 혹은 장애인증을 보여달라 요구하는 공무원들에게 희정은 결국 밝힌다, 나는 지문이 없다고. 공무원들은 즉시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지문이 없음은 식별 불가능을 의미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다른 절차를 끌어들여 희정을 그 안에 편입시키려 시도하지만 연이은 실패에 부딪힌다.
여기서 희정이 끝내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점이 흥미롭다. 그의 식별 불가능성은 일종의 자격미달unqualified로써 다루어지고, 이 사실이 수치심으로 내면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거대 시스템으로 체현된 권력이 자꾸만 그 안에서 빠져나가려 드는, 즉 식별 불가능성이라는 권력의 객체로서의 ‘결함’을 가진 개인들을 가장 손쉽게 포섭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들 스스로가 외부에 의해 정의되고 싶어하도록 욕망을 조작하는 일이다. 지문 날인되지 않은 발급 서류를 제출하면 경찰서에서 반송된다고 말하는 공무원들. 자기를 둘러싸고 번잡한 장면이 연출됨에 희정은 고개를 더 푹 숙인다. 이때 사다리에 올라있던 기사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형광등을 떨어뜨려 산산조각 내는 데서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러 가는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내 경우 발급 시 지문을 날인한다는 것을 모르고 간 상태에서 담당 공무원은 탁자 위에 무심코 올라와있던 손을 잡아 가져가더니 알아차릴 새도 없이 새카만 인주에 푹 눌렀고,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러버렸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주민등록증을 꺼내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생생히 상기되는 거대한 폭력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아마도 그와 유사한 절차를 겨우 마쳤을 희정은 주민등록증 신청이 늦어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다시 처하고, 도망치듯 피하며 영화는 끝난다.
수진들에게, 강연하, 2009 910712희정, 유원상, 2010
놈에게 복수하는 법
최미경 2010
영화는 바로 전 상영작 <꽃님이>에 이어 다시 지하철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에 지하철은 습관적이고 선택적인 폭력이 잠재한 공간이다. 공공장소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여성들은 순간적으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하나는 추행이 지금 정말로 내게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내가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가 이다. 이 둘은 사실 같은 맥락에서 비롯한다. 전자를 고민―성폭력과 성폭력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피해자 개개인에 의해 설정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호해져야 할 필요는 없는데도, 그것은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심지어 없는 것처럼 가장되기까지 하므로―하며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후자에게로 뻗어가는 사고의 회로는, 후자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울 경우 다시 돌아와 전자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고착시켜버린다.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은 성폭력이 계속해서 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맞물린 복합적인 것이다. 언어로, 물리적인 힘으로, 공권력에 의지해서, 혹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쓰면 될까? 그렇게 지금의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상흔은 남는다. 이 흔적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 이 영화에서 고민하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그곳에 있다.
감독이자 주인공이 호신술 도장에서 악을 쓰며 외친다. “죽일 수 있어!”, 무엇을 죽인다는 것일까? 언뜻 과도해보이는 이 구호를 액면 그대로 반복-복제되는 폭력이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좀더 영화와 밀접한 논의를 위해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감독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과 복수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의 모습에서 보이듯 지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감히 완전히 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생존자들이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즉각적으로 택하는 흔한 방법이 도망치기와 싸우기이다. 전자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도 생존자들이 폭력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칠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그리고 기꺼이 싸우는 쪽을 택한 생존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분노가 쉽게 특수한 가해자 자체에게로만 향하는 것을 막기 어렵다. 그들이 ‘죽일 수 있다’고 외치고 싶은 것은 기억 속에서 유영하는 가해자와, 그를 둘러싼 상황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분노하는 생존자들, 그리고 마침내 그 분노마저 뒤로 하고 아무렇지 않아진(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스스로에게 다시 묻기에 이른다. “지금, 내가, 괜찮으면 된 건가?”
그렇게 이 소박한 복수극이 기획되었다. 이에 대해 감독의 오래된 절친한 남자 친구는 ‘(차라리) 결혼을 하라’고 진심을 담아 조언한다. 성폭력을 가하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폭력―일종의 처분―을 가할 권리를 부여하는데, 그의 가정에 따르면 결혼을 한 여성은 그 객체가 될 수 없다. 여성들을 자유로이 처분할 권리의 행사를 방해할 수 있는 지점이란 이를 테면 결혼과 동시에 ‘보호의 의무’의 대가로 가부장이 가족 구성원들에 대해 획득하는 독점적 권리 정도인 걸까.
주인공은 지난 가해자들 중 한 명인, 알고 지낸 지 10년이 된 동기와 만남을 갖는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게 된 것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내보이며 말한다. “해를 주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끼쳤을 지도 모르는 피해에 관해 말할 때조차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다시 말한다. “죄값은 정상 루트로 받아야지!” 아아 가해자들을 추적해 사과만을 받아내려던 이 기획은 애초에 소박해서는 안 되었던 것 같다. 그가 마침내 격앙되어 외친다. “내가 성폭력자야?”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를 불가해한 괴물로 상정하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가 10년 만에 만나서 이래야 해?” 그들이 10년 만에 만나게 된 이유는 사건 이후 감독이 그 모임에 나가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침묵하고 자신을 숨겨야만 했던 감독이자 주인공은 이제 약자의 검으로서의 카메라를 들고 그들 앞에 섰다. 그가 원하는 복수는, 폭력을 재생산 함으로써가 아니라 다시-말해지는 과정을 통해 달성된다.
또 다른 가해자인 외삼촌을 만나러 부산에 간 감독은 잠시 들른 바닷가에서 돌연 두려움에 휩싸인다. 배경으로 두고 선 해가 다 질 때까지 바다를 향해 스스로를 북돋는 말들도 외쳐보고, 만나기 싫다고 홀로 징징거려도 보고, 돌아서서 울어보기도 하며 주저한다. 줄곧 촬영을 도와 온 조감독이 마침 없었던 그곳에서 그는 끝내 삼촌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영화를 마친다. 다시-말하는 작업은 생존자들을 트라우마 앞에 마주 서게 한다. 이후 어느 인터뷰에서 조감독은 감독이 촬영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맥락에서 갑자기 눈물을 터뜨릴 때가 있었다고 회고하는데, 폭력의 기억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언제든 재생될 수 있다. 다만 이 복수는 그것과, 그것에 동반되는 두려움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에 관한 작업이다. 따라서 그의 복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은 아니다.
요구르트 아줌마
김로유 2010
영선은 외모를 비하하는 프로그램을 무심하게 보며 홀로 밥을 먹고 있다. 여성의 외모는 사회적으로 설계되고, 정정되거나 훈육되어 소비되는 일종의 공공재이다. 여성 연예인은 특히나 외모를, 그리고 외모로서 철저히 착취당한다. 바로 그런 이들이 루한의 핀업 걸로서 집안 벽면마다 자리하여 뇌쇄적인 눈빛을 뿜어내고 있다.
영선은 이혼한 후에도 전남편의 폭력적 언행과 무리한 금전 요구에 시달려야 한다. 그는 경제적인 착취,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폭력을 묵묵히 받아내 주는 존재다. 또한 요구르트 배달 자리를 얻기 위해 아파트 경비원에게 ‘알선’ 되기를 부탁하는데, 그의 외모 혹은 성―영화에서는 명시되지 않는다―을 착취하는 자인 경비원이 권하는 ‘차 한잔’과, 유은하의 팬인 루한이 권하는 ‘차 한잔’의 사이가 꽤나 멀어 보인다.
그의 정체는 어디에 있을까? 영선? 요구르트 아줌마? 언덕에서 곧잘 멈추는 카트는 이혼 후에 여성들을 덮치는 생활고와 닮았다. 혹은 가수 유은하일까? 예쁜 얼굴의 가수 유은하는 연예인이면서 뮤지션이라는 양면을 가진다. 따라서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영선은 외모를 소비/착취당하면서도 동시에 음악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일이 가능하다. 다만 루한은 영선의 외모만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좋아하고 알아봐주는, 그리고 마침내 되찾게 해주는 사람이다.
기타를 연주하며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는 영선에게는 예쁜 얼굴을 볼 수 없다. 그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혹은 언제나 돌아보는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아마도 유은하에게서 음악만을 남긴 부분일테다. 끝내 뒤돌아 앉은 그대로 마무리되는 라스트 씬은 언제고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파마
이란희 2009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로안을 바로 미용실로 데려온 시어머니. 그에게 로안은 오늘부터 ‘제삿밥이나 챙겨주’길 기대할 수 있는 가족이 되었다. 로안에게서 여권을 건네 받으며 “엄마가 보관할게”―낯설지 않은 멘트!―라고 확언하지만 로안에게 여권은 아마도 일종의 볼모일 게다. 말이 통하지 않는 로안을 보며 결함 있는 물건을 가져온 것처럼 혀를 차는 시어머니. 그를 가족관계에 편입시키면서도 동시에 상품으로 취급하는 일은 정상 가족을 이루는 핵심인 결혼이 본질적으로 물물교환임을 재확인시킨다. 또한 특정 외국어의 구사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해당 언어권에서는 곧바로 지적 열등함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시어머니가 로안을 아이 다루듯 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가족 프레임 안에서 며느리, 특히 타 문화권에서 온 며느리는 포섭된 이물異物로서 보호되고 관리되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족 구성원들과 동질화되기를 끊임없이 요구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시어머니와 미용실 사람들은 로안을 두고 “한국사람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수군거리며 자신과 같게 만들고싶은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각자가 이미 어느 가족의 며느리였기 때문이고, 시어머니가 오늘 하루 종일 시장을 돌아다닌 것처럼 가족을 위해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시어머니를 뒤따라 계단을 오르는 마지막 씬에서 로안이 고향으로부터 가져온 캐리어는 유독 무겁다. 오늘 하루로 벌써 예고되는, 앞으로 펼쳐진 이곳에서의 삶처럼.
침묵을 말하라
http://indienbob.tistory.com/417
파마, 이란희, 2009 요구르트 아줌마, 김로유, 2010 놈에게 복수하는 법, 최미경, 2010
2010 1006-1009 씨네코드 선재
주최_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
언제나, 누구에게나 선택과 결정의 시간은 길고도 외롭다. 그 시간이 지나고 당신이 무언가를 "시작"했다면,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4회 여성인권영화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시작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결정과 그들의 용기와 그들의 출발을 격려하고 싶다.
더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이제 견디는 건 그만하겠다고 그리고 더 이상 모른 척 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 시작한 당신, 우리가 사랑하는 당신. 그래,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www.fiwom.org
끌로딘
느리게-꾸준히 생각하고픈, 예술과 철학을 사랑하는 이.
아직 미완성이에요.
twitter : @IncompleteY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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