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12:29ㆍReview
-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시간을 파는 남자」
- 김해진
- 조회수 827 / 2008.03.06
세 개의 나무상자가 잇대어 쌓였다. 옆면에 그려진 그림이 합쳐져서 좌변기가 생겨난다. 어떤 나라의 김씨는 좌변기에 앉자 비로소 집중이 된다. 화장실에 가서야 골똘한 자기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이 사람, 누구를 닮아 있나. 화장실 바깥에서 염탐하듯 점점 김씨를 좁혀와 일은 많고 시간은 없다며 닦달하는 사람들. 이들은 또 누구를 닮아 있나.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의 2008 신작 <시간을 파는 남자>(원작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극본 이가현, 연출 민경준)가 지난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LIG아트홀에서 공연됐다. 토요일 낮 공연을 보았는데도 객석에는 사람들이 꽉 찼다. 시인 김지하의 얼굴도 보여 괜히 신기해한다. 무대 오른쪽에는 가야금, 해금, 콘트라베이스, 타악기 등이 자리를 잡았다. 왼쪽 회색 벽에는 여러 개의 문이, 각각의 문 위에는 시계가 걸려있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잘도 갔을 것이다. 흰색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바쁘게 굴러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힘들게 출근하더니 저마다 벽 앞에 서서 타자를 친다. 굽혔다 폈다 하는 무릎, 모니터와 타자기를 번갈아 쳐다보는 머리의 움직임은 흡사 닭장에 갇힌 닭이 모이를 쪼는 모습과도 같다. 김씨는 이런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데, 주택융자를 갚기 위해서는 35년의 세월을 꼬박 일하는 데 바쳐야 한다는 끔찍한 현실과 마주한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가 싶더니, 김씨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꿈꾸던 ‘붉은 머리 개미’ 연구를 시작하는 대신, 우선 사업으로 돈을 벌겠다고 결심한다. 여기서 그가 회사에 사직서를 내는 과정을 재치 있게 풀어내는 판소리는 진득한 재미가 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사직서를 수리할 상사가 매번 자리를 비우고 있어 흰 봉투는 점점 더 초라해진다. 이야기를 굽이굽이 풀어놓는 배우의 솜씨가 눈에 귀에 착착 감긴다.
‘시간’을 통에 담아 팔기로 하고 ‘5분의 자유’, ‘2시간의 자유’, ‘일주일의 자유’, ‘35년의 자유’를 잇따라 상품으로 내어놓는 김씨의 자유주식회사. 대박이 나면 날수록 더 많은 시간통들을 만드느라 자유주식회사는 시간이 없다. 시간과 여유도 돈으로 사야하는 시대, 시간을 파는 회사도 시간이 없기는 매 한가지인 시대, 이 시대 역시 어느 시대를 닮아 있나.
타루는 그들만의 솜씨와 재주로 국악과 판소리, 스페인에서 건너온 이야기를 엮어 신선한 뮤지컬을 만들어내는 녹록지 않은 작업을 거쳤다. 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이며 연기하는 일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뿜어내는 강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시간을 파는 남자>는 연주자와 소리꾼의 공동 즉흥으로 먼저 음악을 만들어가고 나중에 전체 틀을 정돈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하니, 각각의 배우들이 지닌 충실한 역량을 가늠할 만하다.
정신과 의사의 시원한 소리와 노래의 마디 끝을 올려 맺는 창법은 인물의 개성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봤나, 봤나, 사랑해봤나”처럼 반복되는 리듬은 아기자기한 맛을 느끼게 한다. 5분통을 만드는 공장을 나오며 “전문가들, 못쓰겄어” 툭 내뱉는 김씨의 말은 틀에 갇힌 프로들의 뻣뻣함을 익살맞게 꼬집어 웃음을 자아낸다. 해금과 가야금, 콘트라베이스 등으로 만들어낸 여러 효과음을 알아챌 때마다 듣는 재미도 느낀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씨가 처음으로 붉은 머리 개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발견하는 장면이라든지, 인생결산으로 넘어가는 대목, 혼돈에 빠진 사회를 다시 구하게 된다는 공연의 결말은 갑작스러운 데가 있다. 각기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 ‘전환’으로 기능하는 중요한 지점들인데, 응축된 이야기를 담은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연결 고리에 틈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관객은 작은 5분통에 시간을 담는 과정을 무척 기대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주로 바닥 쪽(눈높이 아래)에서 표현돼 잘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거리게 됐다. 또 어떤 나라의 대통령이 커다란 인형이 되어 출연한 것은 보는 데 즐거웠지만 왜 그러한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의아했다.
국악과 판소리의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란 어떤 것일까. 씩씩하게 발음해본다. “오리지낼러티”. 국악과 판소리의 이른바 ‘전통미’가 아스라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운데 오리지날 커피믹스 같은 발음이 슬렁슬렁 섞여오는 이유는 뭘까. 여러 요소가 섞인 공연을 보아서인가?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 타루의 솜씨와 재주는 고집스런 전통이 제 몸을 두루 쓰며 현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역설적이게도 좀 더 국악과 판소리에 진득하게 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국악과 판소리의 원형,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2시간의 자유’와도 같은 공연 시간을 체험하며 타루의 가능성을 ‘원점’에서 헤아려본다.
* 국악뮤지컬집단 타루는 2001년 창단부터 판소리와 탈춤, 국악 중심의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한 국악뮤지컬을 창작해 온 국내최초의 국악뮤지컬 창작 전문 집단이다. 10년 이상 국악을 전공한 전공자들로 구성되어 국악의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틀에 갇히지 않은 과감하고 기발한 창작 작품들로 인기를 얻어온 단체이다. 타루는 우리 삶과 멀어진 국악을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새롭게 재창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타루의 공연은 우리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뮤지컬로 거듭나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공연으로 자리 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홈페이지 www.taroo.com 카페 taroo.cyworld.com
*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의 2008 신작 <시간을 파는 남자>를 만든 사람들 *
소리꾼 배우 - 김용화, 박은정, 권아신, 이소연, 안이호, 이성희, 권송희
악사 배우 - 정종임, 구수정, 손정화, 백하형기, 신원영
연출 민경준, 극본 이가현, 작곡&음악감독 노선락, 작창감독 김용화, 안무 김설진, 드라마터그 이한나, 무대감독 박혜림, 무대&소품디자인 여신동, 미술조연출&일러스트 최수연, 조명디자인&오퍼레이팅 이유진, 의상&분장디자인 이지혜, 소품디자인 조철륭, 음향디자인&오퍼레이팅 빈동준, 영상디자인 신두영, 영상 오퍼레이팅 문재호, 웹포스터 디자인 양경미, 인쇄 디자인 정진영, 포토그래퍼 최은선, 기획 권오영, 곽동근
이상 <시간을 파는 남자> 팸플릿 참고
* 사진제공 - 국악뮤지컬집단 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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