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12:32ㆍReview
- 페스티벌 봄 참가작 : 구동희 「비극경연대회」
- 김해진
- 조회수 634 / 2008.04.03
페스티벌 봄 참가작, 구동희 <비극경연대회Tragedy Competition> 리뷰
15분 45초 보고 그보다 더 생각하다
작년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던 것이 ‘페스티벌 봄’이 되었다. 국제다원예술축제를 표방하는 이 축제는 2회째를 맞이하는 이번에 영상미디어 쪽으로 보다 더 고개를 돌린 느낌이다. 작품 소개에서 ‘필름’, ‘영상’이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각각의 작품이 담아내는 성격 및 공연성은 영상의 특질과 별개라 하더라도, 영상미디어는 이제 페스티벌 봄에서 또 다양한 무대에서 ‘익숙한 재료’가 되고 있다.
사실 15분 45초만 본 것은 아니었다. 지난 3월 31일 구동희의 <비극경연대회>는 4회 연이어 상영되었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마다 일어설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렴풋이 감지한 까닭이다. 비극이, 고통과 슬픔에 찬 이야기가 우승을 거머쥔다는 이 4회 연속의 리바이벌이 서서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리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도 비극경연대회는 끝나지 않는다는 과장된 심리도 엉덩이를 무겁게 했다.
연녹색과 연보랏빛의 축제 깃발들을 총총히 지나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소극장에 도착했다.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끔멀끔하다. 극장 안에서 데면데면히 어둠을 기다렸다.
관객은 열 명 남짓. 화면 속에서 비극경연대회가 시작됐다. 강의실에 긴 책상 세 개를 이어붙이고 11명의 배우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각자 마음을 다잡는가 싶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며 죽 늘어서 앉은 사람들이 우스워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속에서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은미야.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과 동생에게 잘 하고 싶다는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런데 연극해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
개인의 진실이든지, 사회의 통념이든지, 연기의 국면이든지 그 이야기는 귀에 와 박혔다.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자니 카메라는 곧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고, 다시 나타난 그녀의 얼굴과 염색한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눈빛은 자신 안으로 슬며시 후퇴하는 듯 보였다. 말하자면 그녀의 비극 혹은 그녀가 말하는 비극, 그 절정은 비교적 대회 초반에 터뜨려진 것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작아서 들리지 않았고 “나 바보같아.”라는 말이 지나간 것도 같다. 카메라가 클로즈업한 다양한 얼굴들은 비극을 경연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거나 말이 나오지 않는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의 왼쪽으로 퇴장했다. 시간이 지나 두 명이 남게 되었을 때, 카메라 곁 촬영자의 나지막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방울져 흘러내리고 침 튀어 발화되는 비참함이 더욱 선명하게 경쟁했다.
“보고싶어!”라는 외침으로 다다른 한 배우의 비극은 이내 사그라졌다. 언제 절정으로 이를 것인가, 이야기의 지구력이 어느 만큼인가에 따라 우승이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관객이 그런 순간을 인식하는 것은 잔인했다. 어느덧 비극을 심사하게 되는 기묘한 위치. 이야기의 전달에 설득력이 있는지, 눈물 흘리며 소리치는 배우의 맞은 편에 그와 대화하는 보이지 않는 상대가 있는지, 배우의 표정이 어떠한지, 목소리가 잘 들리는지, 책상 위로 드러난 상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흔들리는지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서늘해졌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긴 생머리의, 화장기 없는 배우가 우승이었다. 이 배우의 비극은 너무도 내밀해서 들으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내가 손댔다”
“경찰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나?”
“언니는 남자 많잖아, 나는 하나잖아.”
“속옷 벗고 그 방에서 그 짓 할 때!”
“유식한 사람들 말로 ‘보상’받고 싶더라. 그렇게 해서라도…….”
“왜!”
“내가 그 도둑년이라고, 꼭 잡으라고…….”
철학자 김상봉은 저서『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비극을 ‘슬픔의 자기 반성’이라고 적고 있다. 우승자의 비극 속에서 질투와 미움, 복수가 들끓는 풍경은 그녀에게 가혹해 보이면서도, 그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에 안온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문득 비극이 남아서 발화된다는 것은 슬픔이나 고통이 제 뒷통수를 보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동희의 <비극경연대회>에서 연극은 탁월한 아이디어에 힘입어 빛을 발한다. 과거 그리스의 뛰어난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일화를 동기로 작업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극경연대회에서 최다 연속 우승했던 그는 제3의 배우를 등장시킨 소포클레스(Sophocles)가 출현하면서 고배를 마신다. 타향 시실리로 떠나는 ‘무너진 순간’이 그의 비극작품들보다 더 비극적으로 되어버렸다는 구동희의 생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11명의 배우들을 나란히 앉게 한 셈이다.
<비극경연대회> 안에서 말과 눈물은 화면 안에서 이편으로 또박또박 걸어 나온다. 카메라의 시선과 함께 배우들과 마주하면서 흡사 심사위원인 듯 느꼈던 기묘한 위치가 다음 대회의 대기자인 것처럼 불안해진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15분 45초에서 더 멀리 달아나 생각할수록 이 지면에서는 스포일러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 작품 속에서라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상황 또한 아이스킬로스가 ‘무너진 순간’ 만큼이나 비극적이다. 구동희가 포착한 ‘개인의 비극’은 지금의 시대에 엿보는 혹독한 연극게임처럼 보인다.
보충설명
구동희 <비극경연대회>
* 출연 - 정희태, 변현석, 임채린, 박창수, 신영애, 한재우, 김지훈, 김연아, 장정애, 최현정, 윤인조
* 촬영 - 이정인, 남지웅, 장정혜, 조희명
* 사운드 - 최윤성, 이원욱
* 도큐멘트 - Sasa[44]
비디오 작업 <비극경연대회>는 11명의 전문연기자들이 가공된 상황(각각의 연기자들 중 최후까지 말하며 우는 자가 자동으로 승자가 되며, 그 자리를 떠나든지 더 머무르든지는 각 연기자의 자율의지에 따라 정해진다) 하에 어떻게 비극 연기자 역할을 물리적인 눈물과 스피치로 해석되는가에 대한 과정을 경쟁 구도 하에 스크립트 없이 기록한 시추에이션 드라마(situation drama)이다.
<비극경연대회>는 4.4 금 7시 예술소극장에서 또 상영된다. 관람료는 무료.
* 이상 페스티벌 봄 홈페이지 참고 www.festivalbom.org
* 사진제공 - 페스티벌 봄
필자소개
글쓴이 김해진은 극단 ‘목요일 오후 한 시’ 단원. 플레이백 씨어터Playback Theatre를 한다.
grippen@hanmail.net http://blog.naver.com/su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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