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코끼리들이 웃는다 <몸의 윤리> "감각을 지배하는 윤리라는 조건"

2015. 9. 6. 10:26Review

 

감각을 지배하는 윤리라는 조건

코끼리들이 웃는다 <몸의 윤리>

 

글_김민관

 

공연에 참여하기 위해 누군가의 문자로부터 접선 장소를 통지받는다. 마치 우리는 이름 모를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가 배우인 것을 알고, 그와의 접선을 통해 공연이 시작될 것을 알며, 눈을 가리고 그에게 의존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공연이기에 마찬가지로 그 끝이 있으리란 걸 짐작한다. 한층 기민한 관객이라면 이 어둠이 끝날 것도, 그 무력해진 몸을 기꺼이 맡겨도 그 끝은 다시 하나의 어둠 속 기억으로만 남으며,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이곳 밝은 빛의 시작으로 반환되며 끝날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존재했을 뿐인, 다만 존재했었던 것으로 감각되는 극장, 그것이 극과 하나 된 완전한 그리고 온전한 극장의 자리일 것이기에.) 하지만 어딘가에 도착해 이 안대가 벗겨졌을 때 역시 남는 건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서 본다는 건 무엇일까. 이는 전적으로 보지 못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눈을 뜨나 감으나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것 역시 명확하진 않은 설명이다. 이는 그 어둠에 익숙해져간다는 것이고, 그 어둠을 촉각적으로 더듬으며 그 어둠을 파악하려 애쓰는 가운데, 그것과 하나가 된 나 자신을 어둠의 밀도와 닿는 지점에서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너무 가까이 나를 어둠을 보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떨어지는 대신 한 치 앞이 가늠 안 되는 상황에서 나는 나 자신과 너무 가깝고 동시에 어둠은 나와 너무 가깝다. 하지만 물론 나는 혼자가 아닌데, 이는 나를 인도했던 배우, 그리고 나와 같이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배우들과 접선해 이곳에 이른 다른 관객들이 나와 같이 길을 잃고 목소리에 이끌려 겨우 방향을 헤아리고 있음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한자의 ‘名(이름 명)’이 밤(夕)과 입(口), 곧 완전한 어둠 속에서 사람(공동체의 일원)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라는 한자의 기원을 따져보면 어둠을 다스리는, 거기서 소통하는 방법은 촉각이 아니라, 오히려 청각이라는 단서를 얻으리라. 어둠과의 가까움, 곧 내 자신이 어둠인 곳에서 누군가와 거리를 벌리며 공간을 가늠하는 건, 소리를 통한 그 거리의 식별을 통해서다. 그 점에 유의한다면, 이 공연이 의외로 촉각적인 것보다는 청각적인 것이 지배적이었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우선 <몸의 윤리>가 요구하는 것은 이 어둠에 익숙해질 것과 그 어둠에서 사람들의 시선 자체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마치 무력한 몸으로 배우에게 벌거벗겨진 것과 같은 시작부터 우리가 배우를 믿어야 했던 것과 같이 <몸의 윤리>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의 믿음을 요청한다. 그것은 우선은 몸이 아닌 목소리였다. 배우에게 몸을 기대는 행위 역시 그것이 목소리와 동시적으로 우리를 지탱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헤드폰의 음성은 우리를 타이르고 구슬리며 우리 내면에 흡착된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 옆의 타자들의 위치에서 나오는 게 아닌 그 타자들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묶는 하나의 ‘법’으로서, 우리 자신의 윤리의 지점들을 촉발시키는 차원에서, 그 타인들의 경계에서 나 자신을 위치시키는 차원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곧 그 말은 어둠에서 설 자리, 보고 판단할 자리를 알려주며, 우리는 마치 이름이라도 불러 누군가를 식별하기에는 그 이름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그 상황에서, 모두 무명씨인 그 급작스런 환경에서, 스스로의 운명의 목소리로, 하나의 정령이 내는 목소리로, 게니우스(수호신)처럼 내 안에 머무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말로 그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극장 밖에서만 그러한 목소리로 작용했던) 배우에게서 인계된 헤드폰 속 그 말이 한편 더 힘을 지니는 것은, 그것이 사실 명령과 지배, 혹은 통제라는 사실을 지우는 갖가지 유아어에 가까운 단어의 사용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마치 우리를 어린아이라는 순수한 혹은 순진한 하나의 몸으로 환원시키는, 그리고 그 과거로 곧 돌아가게 하는 이 어둠과의 맞닥뜨림 속에서, 사실 계속 윤리의 실험과 방향의 인도를 주는 그 목소리는 어린 시절 우리의 손을 잡아끄는 목소리처럼 자리한다.

<몸의 윤리>가 제시하는 그 윤리란, 첫 번째로 온전히 내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여기서 발가벗겨짐이 곧 자유로움으로 전환되는 것은, 이것이 어둠이라기보다 모두가 똑같은 상황에서 자율적인 판단 하에 그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잇는 차원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벗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그러니까 우리는 나체로 보이게 되지 않는다) 다 벗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걸어 나가는 것 같은 희미한 내러티브를 완성하는 차원에서 이것은 꽤나 쉽지 않은, 쉽더라도 뭔가 결정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스스로 배제할 순 없다. 설사 그러한 나아감을 빛이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 은유하지 않아도 모두가 벽에 띄엄띄엄 머물러 있다가 하나의 중앙으로 모이며 가까워진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다.

여기서 <몸의 윤리>는 배우에게 몸을 맡겼던 것처럼 그저 공연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막연하지만 절대적인 믿음에 우리 스스로를 던지게 한다.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어차피 누가 누구인지 모르며 끝내 모를 것으로 남는다면, 누군가의 은밀한 부위를 설사 만지게 되더라도 문제는 없는 것인가, 여기서 <몸의 윤리>는 몸이라는 하나의 무한하고도 좁은 가능성만을 남겨둘 뿐이다. 몸이 느끼는 촉각의 다양한 지점들의 무한함과 그저 우리는 평등한 하나의 몸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전제가 그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 자유로움은 그 하나의 목소리로부터만 도출되는 것은 아닌가, 결국 우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 뒹굴고 하나의 원을 형성해 서로를 같은 방식으로 만지고 그 만짐을 고스란히 전달하려 노력하게 된다. 몸은 몸일 뿐이다. 과연 그런가. 누군가가 나를 만지는 것에는 봄의 분별이 없으며 공연이 요구했던 또한 심어줬던 소박한 그러나 절대적인 믿음 그 자체에 대한 믿음 아래 그냥 건전한 몸의 만짐이 우선한다. 그 촉각의 체험은 공연 전반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다. 사실 그 보이지 않음에, 곧 모든 이미지를 지운 공연에서 예측하지 못한 이미지가 끼어드는 것, 곧 그 믿음의 전제 대신, 어떤 불결한 상상이나 욕망의 충족에 대한 우려는, 결과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질 모든 변수를 고려해야 했던 창작자의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적어도 첫 이번 공연에서는.

이는 자유로움을 위한 최소한의 절대적인 통제가 실은 하나의 믿음(‘우리는 눈을 감고 상대를 완전히 믿어도 돼’)의 전수로부터 비롯되며, 그 연약한 끈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타락하기 쉬운가, 적어도 시선이 감시의 절대적인 역학 작용을 한다고 가정하면 그럴 것이다. 우리는 덜, 아니 대부분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 옆에 주어진 몸들의 가까움은 마찬가지로 하나의 눈이다. 우리는 그것을 대상화할 수 있기보다, 실은 공연은 그것이 그저 몸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 몸들은 나와 같이 나체로 혹은 그에 가깝거나 그렇지 않은 채 앞으로 나오며 하나의 선택적 주체로 새롭게 태어난 이후, 나와 같은 하나의 주체라는 전제하에 그것을 함부로 막 다룰 수만은 없게 된다. (몸이 몸일 뿐이라고 하는 것 역시 몸과 연관된 그렇지만 몸의 문제로만 드러나지는 않는 수많은 현실을 은폐하는 우를 범하게 한다.)

그 ‘같다’라는 건 실은 자유로움의 체감은 모두가 다를 것이기 때문인데, 신체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이곳은 하나의 동심의 놀이터이며 동심원의 집단 놀이가 파생하는 운동장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목소리라는 하나의 법이 미세한 조율들을 했다는 것을 간과할 순 없다. 역설적으로 자유는 모두의 시선이 보이지 않음(또한 기능하지 않음)에서 오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특정한 시선을 가질 수 있음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다른 개체로서 하나의 공통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나타나는 집단에의 도취적 놀이가 가능한 것은, 그러나 모두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 어둠과 자신을 한데 엮어보는 경계, 곧 우리의 몸과 엮어지는 경계가 사라져가는 가운데 하나의 다른 몸들로부터 오는 하나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가 어둠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생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어떤 판단과 함께 있던 시선은, 누군가의 신체를 더듬으며 밝아지며 이는 이내 내 손의 촉각과 몸으로 옮겨간다. 그러니까 나는 이 몸을 뚫거나 직시할 수 없다. 그것을 더한 깊이로 판단할 수 없다. 어둠과의 가까움만큼이나 우리 몸 자체의 경계를 타인의 몸으로부터 확인하며 그 닿음 자체만이 남으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시선의 채워짐은 내 몸의 자각이고 또한 (우리 내면의 목소리로 갈음되는) 헤드폰이 잠시 조용해진 가운데 앞서 ‘어둠 속 이름’과 같은 밝아짐의 순간이다.

우리는 하나의 원을, 집단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바깥의 손을, 마찬가지로 우리의 손으로 믿어야 한다. 그리고 말없음의 문법이 비로소 각자 매우 상이하게 차이가 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게 된다. 사실 그건 윤리를 요구하는 타자였을까. 이미 거기엔 타자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데, 다만 멈춘 하나의 몸이 있을 뿐이다. 곧 자유로워진 개체들의 집합이 거기에 있다. 거기엔 남녀라는 성 역할과 문화적 자의식 등의 모든 금기를 벗어난 최소한의 몸 주체로서 환원된, 그래서 평등한 하나의 개체가 있다. 그것은 사실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의 선택을 했을 당시 우리 모두가 이미 그리고 충분히 하나의 물리적인 공동체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청각에 의해 이념적으로 동등해진/평등해진 가운데 그들이 모두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그러한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원을 지을 때, 무언가 공연의 중심이 청각에서 촉각의 좌표로 건너뛰는 것과 함께 (그 청각을 그리고 말을 잃는 동시에) 일시적으로 엮이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몸의 윤리>는 어두워서 모든 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낯선 타인들의 몸으로 잠시 옮겨가 그들이 아닌 내가 살아있음을, 그들 역시 그렇게 살아 있음을 본다(/감각한다). 그 최소한의 접촉 공동체는 우리가 엮어 있고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는 벌거벗은, 그래서 최소한의 개체로 환원된 차원에서 그 벌거벗음만큼이나 서로에게 적대적이지 않으며 그 최소한의 접촉으로 일정 정도의 존중을 표하는, 그래서 어떤 편견이나 복잡한 인과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라는 세계를 공유할 수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원형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적 개체로서 환원된 특정 상황에서의 동등한 ‘나’들이 하나의 몸으로 다시 축소돼 서로의 있음, 그리고 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최소한의 것, 절대적인 것 자체인 몸을 확인하는 건 그렇게 어둠 앞으로 나아가기 전 잠시 내 맨발에 파우더를 발라주는 손에서 시작된 나와 너의 보이지 않는 만남과 거기에 깔린 신뢰에서부터 시작된다. 거기엔 어떤 물음이 유예된다. 바로 다시 어둠이 걷히고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자유로움을 선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선 <몸의 윤리>에서 이 일시적 공동체는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하나의 기원을 깨워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사실 어떤 최소한의 접촉이 결코 보이는 곳에서 이룰 수는 없었던, 나체 혹은 나체에 가까운 몸으로의 환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결부돼 <몸의 윤리>는 관객이 소리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그러한 무력한 몸을, 여전히 하나의 밀도 높은 어둠의 매질에서 하나의 경계로서의 의식을 깨우는(곧 눈을 뜨이게 하는) 누군가의 몸에 대한 접촉으로 묶인 원환의 공동체의 속함으로 옮길 때, 우리는 어둠에 속해 있음에서부터 내적 각성을 겪는 철저한 혼자에서 공동의식을 치루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연대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안에서 오로지 강렬해진 감각의 소용돌이를 보는 차원에서 그것을 자유로움이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윤리로 치환될 수 있는 무력한 신체들에 대한 방향과 동선을 안정시켜주는 목소리(청각)와 하나의 의식(儀式) 차원에서의 연대로 바꾸는 결코 더 나아가지 않는 만짐(촉각)의 동등함과 그 집단성 안에서만 성립된다(그렇지만 물론 그 의식의 명확성은 어둠으로 인해 감소되거나 인지 불가능한 수준으로 취약해질 수 있다).

혹시나 모를 사고나 민망한 일(?)에 대한 안전을 사실상 서로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믿음으로 유예시키는, 자유로운 선택의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 관객을 먼저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작품은 ‘보이지 않는 윤리’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그 안에서 모든 일을 통제할 순 없다. 누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역시 완전히 측정할 순 없다. 또한 이와 같은 공연에 대한 정보가 이미 익숙해지게 됐을 때 갖는 무력한 자아의 어둠의 적응 기간 따위가 사라진 또 다른 자율적 주체가 공연을 보게 됐을 때 공연이 이끌 수 있는 역량은 꽤나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은 이들 역시 자신들의 몸의 윤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모두 벗었고 또한 볼 수 없는 조건에 기꺼이 또 무모하게 스스로를 내던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공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헤드폰의 목소리는 이 밖에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곧 유일한 신적 조건에 가까웠지만, 실은 그도 이곳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밖에 있었을 뿐이다. 결국 이 공연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감각에 대한 체험, 모두가 나체가 될 수 있는 조건의 달성, 어루만짐이 갖는 평화적 공동체로의 도약… 앞서 말했듯 이것들은 모두 어둠이라는 극장의 환영적 조건 아래 있다. 이는 실재적 감각을 상기시켜주는 듯하지만 실은 그것이 어둠이라는 조건 아래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빛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우리는 우리가 극장 안 사실상 관계없는 공동체로 묶여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의 일상의 개체들로 돌아가게 된다.

<몸의 윤리>에서 중요한 건 순수한 몸(에)의 체험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둠에서 그것이 은유적이든 환유적이든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갖는 내러티브성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관객 각자의 내적 의식이며, 그것이 갖는 하나의 희미한 빛, 곧 보임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어둠을 경유한 우리와 같은 우리(나)를 만지는 것으로 이 세계를 확인한다. 어쩌면 우리는 문화적 편견에서 벗어났다기보다, 문화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인식을 얻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보이지 않음과 함께 인위적으로 지워진 가운데, 곧 몸이라는 우리가 거주하는 몸을 낯설게 확인해야 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으로 환원된 타인의 몸들을 확인하는 것으로써 나의 어떤 경계를 시험하는 것만큼 자유를 얻는다. 거기엔 수많은 ‘나’들, 한쪽의 감각이 축소된 만큼 다른 한쪽의 감각이 확장된, 자유롭지 않음만큼 자유로운(실은 분명해진)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작품이 자유를 내적으로 선택하는 것의 분기점이 있었다(실은 그러한 선택에 대한 체험이 가장 강렬한 하나의 원체험이기도 했다).

 

 

<몸의 윤리>는 현실 비판적이거나 사회에 대한 비평적 결을 내재적으로 품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들 모두를 축소시킨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기원 혹은 순수라고 지칭하는 것이 실은 그것이 아닐 수 있음을 언급한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정치성을 띤 각자의 몸들의 동등한 공동체는 어쩌면 순수한 물음 그 자체다. 그것을 성립시키는 건 역시 앞에서 말했듯 선택적 주체들의 동등함에 있을 것이다. 결코 벌거벗음이라는 매혹적 조건이 주어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원초적 자아로 돌아갔다기보다 하나의 합리적인 주체로 돌아갔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어떤 정치성을 띨 수 있는가, 오히려 나는 이 공연이 자유로움보다 그 자유로움을 선택하며 남들의 자유를 함께 인식해야 하는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몸에 대한 (감각이 아닌) 윤리를 선사한다고 보인다. (사실 우리가 감각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얼마나 의식적인가, 그 점을 <몸의 윤리>이 의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감각이라는 것에 대한 동경·추적은 이 작품을 추동하는 첫 번째 지점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곧 윤리보다는 몸의 감각에서부터 시작된 공연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공연에서 부모의 혹은 신의 음성을 따르는 어린아이로 돌아갔었다. 어쩌면 이것은 관망하는 관객으로 남으려는 전문적인 공연 관계자로서의 의식을 가진 이들에게는 실은 참여가 잘 안 되는 회의의 지점을 남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점은 이들이 실제 옷을 잘 벗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우리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옷을 벗은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동등해지기 위해. 그것이 하나의 몸의 윤리일 수도 있다면, 우리가 공동체성을 이루는 섞임에서 이탈하지 않는, 곧 어린 양이 되지 않기 위해 공연은 어떤 조건을 달아야 할 것인가.

이 공연은 몸의 윤리에 대한 믿음에 기대고 있지만, 몸으로의 환원과 타인에 대한 윤리를 연관시켜 (자유로운) 몸의 윤리를 직조한다. 이는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몸의 자유롭지 않은 몸의 윤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몸의 자유로운 윤리로의 전환. 이 공연을 여전히 몸의 감각에 대한 것들로만 이해한다면 실은 그 몸의 자유가 선택과 윤리와 결부되어 있음 아래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간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적당한 거리를 형성하기 위해 이름을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력하지만 그 무력함을 이끌고 배려하는 서로에 대한 기댐, 곧 가까움으로 자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평등한 가까움은 어떻게 사회적 전환의 한 부분으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인가의 물음은, 감각에 대한 지평을 일깨우는 것 이상으로, <몸의 윤리>가 품고 나가야 할 질문은 아닐까. ■ 

 

*코끼리들이 웃는다 웹페이지 바로가기 >> www.fb.com/elephantslaugh /  http://elephantslau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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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ndienbob.tistory.com/766 (두도시주물이야기)

http://indienbob.tistory.com/868 (201호 아인슈타인이 있다)

 

 필자_김민관

 소개_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온라인 뉴스채널 http://artscene.co.kr 편집장

 

 ▲코끼리들이웃는다 공연포스터(출처_페이스북 페이지)

 ▲코끼리들이웃는다 공연포스터(출처_페이스북 페이지)

▲코끼리들이웃는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유일한(?) 공연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