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4월 레터] 올바른 애도의 방법

2019. 4. 22. 16:43Letter

 

올바른 애도의 방법

몰타에 다녀왔습니다. 지중해의 작열하는 태양을 기대했지만 꽤 추웠고요, 일교차가 커서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푸른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는 제가 머쓱했습니다. (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유럽 축제 연합 (EFA)에서 주최하는 아틀리에가 올해는 몰타에서 열렸습니다. 일주일동안 전 세계의 축제 전문가들과 만나 서로의 작업을 소개하고, 각자가 당면한 과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미래의 협력을 도모하는 자리였습니다. 아틀리에의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의 화두를 반영하여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축제의 역할, 축제의 지속성, 표현의 자유, 이민자와 난민, 기후변화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아틀리에에 가져간 화두는 ‘재난의 앞에 선 축제’ 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오늘날의 축제는 무엇인가? 축제는 어떤 것을 다루어야 하는가?

-누가 축제를 열고 닫는가? 평가하는가? 무엇을 평가하는가?

-그들은 왜 축제(예술)를 믿지 못하는가?

-그들은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애도를 위한 적절한 기간이 존재하는가? 그 다음 해에는 다시 축제를 해도 된다는 것인가? 왜 된다는 것인가?

-재난, 혹은 거대한 슬픔과 마주한 축제 혹은 예술은 어떠해야 하는가?

5년 전 4월,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며칠 뒤, 조용한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조용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거리에 큰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올해 모든 축제를 취소합니다.’ 흰 바탕에 궁서체로. 비현실적인 재난에 한동안 넋이 나가있던 저에게 불쑥 어떤 감정이 치솟았습니다. 분노였습니다. 실로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그 해 대부분의 축제가 취소되었습니다. 이후에 종종 그 현수막을 떠올리며 왜 그렇게 분노했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강요된 애도, 마치 자신들은 올바른 애도의 방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엄숙함. 살아남아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일상을 지속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수치감.

모든 축제가 줄줄이 취소되었고, 저는 대중이 가지고 있는 축제에 대한 인식을 목도했습니다. 다른 예술분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재난 앞에서 예술은 이렇게 ‘쾌락을 위한 소비재’가 되었습니다. 관계자들은 정신적 뿐만이 아니라 이런 물리적인 충격까지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를 내기에도 민감한 사항이고, 당사자 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태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1차 재난에 따른 2차 재난처럼 말입니다.

올바른 애도는 무엇일까요? 애도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또 다른 검열이 아닐까요? 이렇게 만들어진 엄격한 애도의 기준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엄숙하게 애도하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잊으라고 강요하는 것. 심지어 유가족의 애도 기간까지 제한하는 검열 말입니다.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않느나며 관련된 장소를 지우고, 관련된 사람들을 지우고 끝내 기억까지 지워버리는 것 말입니다.

아틀리에에서 이런 질문들을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참가자들이 그룹을 지어 하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서서히 얼굴이 굳어가는 일본 참가자들 앞에서 원전과 방사능 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축제 만들기 게임을 진행하는 참가자들을 보며, 앞선 질문의 답을 구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세월호 참사는 축제를 위협하는 여러 가지 위험요소(risk) 중에 하나로 납작해졌습니다. 아파도 일이 벌어진 곳에서 해답을 구해야 했습니다. 빨리 돌아가 동료들과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저에게 어떻게 극복했는지 물었습니다. 극복?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지난 14일, 수원의 ‘살롱시소’라는 공간에서 ‘이얏호 기획사’의 주최로 작은 콘서트 형식의 포럼이 진행되었습니다. 주제는 <슬픔 속에서 음악은 적절하지 못한가> 였습니다. 2014년 뷰민라 페스티벌 취소에 이어, 4일에 일어난 강원도 산불로 취소된 경기도청 봄꽃축제 취소를 바라보며 물음이 생긴 음악가들이 모여 만든 자리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는 음악공연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중략) 무대공연 38회를 전면 취소했다. 다만 도내 정책과 콘텐츠 기업 홍보 등을 위해 마련한 106개의 부스와 20여개의 푸드 트럭은 정상적으로 운영한다.’ - 기사 중

‘저는 이 글을 보고 오히려 공연을 취소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는 적었는데요, 음악공연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문장이 곱씹어졌어요. 음악이 갖고 있는 이미지들 때문에 음악은 슬픔 속에서 적절하지 않을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고 생업으로서의 음악의 가치가 다른가? 그래서 누군가에게 불편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 주최자의 말

이 자리에서 참가자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음악이 역사적으로 재난 속에서 해왔던 역할로 이어졌습니다.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과 행사를 주최하는 기관들이 감내해야 하는 위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과열되어 있는 사회, 기사를 통해 조성되는 비난의 여파가 재단의 감사, 예산 삭감, 담당 공무원 혹은 직원들의 징계로 이어지는 문제 말입니다. 이날의 자리는 예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예술가들의 역할을 점검하고, 재난에 의한 공연취소에 대한 공식적인 대비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공론화의 초석이 될 수 있는 반가운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세월호: 제자리’를 주제로 한 혜화동1번지 동인의 올해 첫 번째 공연인 이재민x잣프로젝트의 <겨울의 눈빛>을 보고 왔습니다. 좁고 컴컴한 극장, 따로 마련되지 않은 무대, 곳곳에 놓인 객석의 구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지하 대피소에 들어가 둘러앉은 사람들 같았습니다. 관객들은 양반다리를 하거나, 다리를 가슴께로 접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작품은 박솔뫼 작가의 소설<겨울의 눈빛>을 기반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부산의 (가상의)재난 이전, 이후의 풍경과 그곳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야기.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부질없는 이야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개에 대한 이야기. 내리는 눈은 맞으면 안 되지만, 물을 끓여서 차를 마셔야 하는, 인간이기에 필요한 소박한 리추얼에 대한 이야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겹고 지독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등등의 이야기를 몇 명의 배우가 덤덤하게 낭독하거나 침묵했습니다. 웅크리고 있던 저는 문득 지난해 타계한, 다큐멘터리<쇼아(Shoah)(1985)>의 감독 란즈만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측량할 수 없고, 따라서 재현될 수 없는 희생자들의 거대한 고통이 일종의 마비적 감각으로 다가온다.’

<겨울의 눈빛>에서는 이렇게 감각이 마비된 우리가 제자리를 돌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해 본적은 없지만, 어쨌든 긴 애도의 시간에 지쳐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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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필자 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