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개념과 제도의 덫 사이에서 <여름과 연기>

2019. 12. 5. 14:43Review

 

 

개념과 제도의 덫 사이에서

 

 

 

'시장극장'의 이머시브 씨어터 <여름과 연기> @영도시장

 

 

글_채민

 

전통시장의 구조를 무대로 삼은 ‘시장극장’의 <여름과 연기>는 공간의 연출이 돋보였다. 알마와 존의 어린시절을 보여주는 프롤로그는 이층에서 시작된다. 곧이어 동일한 건물의 일층에서 성인이 된 존이 달려나온다. 프롤로그 장면과의 실제적 거리감은 극 중 시간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알마와 존의 재회 후에 관객은 두 무리로 나뉘어 주인공 중 한 명을 선택한다. 나는 시장골목을 지나 도착한 어느 점포안으로 들어가는 알마의 뒤를 따라갔다. 배우와 넓은 창을 사이에 두고 관객은 밖에 서서 장면을 지켜본다. 공간은 알마를 둘러싼 환경을 은유한다. 시멘트로 된 방에 갓전등 하나가 건조하게 달려있다. 마치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알마가 자신의 내면을 닥달하는 취조실처럼 보인다. 장면의 말미에 알마와 굴레와 같은 그녀의 엄마, 그리고 알마의 제자 넬리가 동시에 등장한다. 얼이 빠진듯한 표정으로 오가는 세 여자를 보고 있자면 구시대의 정신병동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존과 로자의 욕정이 붉게 뒤엉키는 공간도 인상깊었다. 그곳에는 로자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뷰캐넌 의사의 죽음이 전시된다.  시신이 마주 보이는 옆 건물 바닥에 놓인 백색 LED 조명은 어떤 그림자도 허락하지 않고 공간을 가득 채운다. 비극이 흽쓸고 간 후에 찾아온 감정의 소강상태가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비워진 공간에 두 배우, 알마와 존은 다시 격정적으로 감정을 쌓아 올린다.

 

사진_'시장극장'제공(김계식)

 

 

영도시장과 이머시브 씨어터

 

시장극장의 <여름과 연기>의 무대는 영도시장이다. 서울 동작구 장승배기에 위치한 영도시장은 1968년에 세워져 90년대까지만 해도 동작구 인근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장이다. 영도시장은 당시만해도 흔치 않던 지붕이 있는 상가형 건물안에 들어섰다. 지붕이 있어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받을 수 있었지만 빈 점포가 많은 지금은 외부의 빛이 들지 않아 더욱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시장 주변으로 주거지역의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전통시장이 쇠태함에 따라 동작구는 영도시장의 자리에 2021년 종합행정타운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대로라면 시장은 비어있어야 하지만 군데 군데 여전히 불을 밝혀둔 점포가 있었고, 곳곳에는 보상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관객은 두 배우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극을 관람하게 된다. 두 인물이 서로 만나면 다음 장면에서는 둘 중 누구의 동선을 따라 이동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관람동선의 안내를 위하여 형광봉을 든 두 명의 가이드가 두 배우와 동행한다. 시장극장은 기획의도에서 이머시브 씨어터 형식을 통해 관객 각자가 자기만의 서사를 완성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_'시장극장'제공(김계식)

 

 

이머시브 씨어터에서 창작자는 장소의 공간적, 건축적 환경을 고안하여 극적 세계를 창조하고, 관객은 그 세계로 직접 들어가 이동하면서 공연자와 마주한다. 극작가이자 퍼포머인 '로즈 비긴(Rose Biggin)'은 그녀의 저서 ≪이머시브 극장과 관객 경험(Immersive Theatre and Audience Experience)에서 ‘이머시브 씨어터’와 '프로시니엄 씨어터’를 구별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를 제시했다. 관객이 시노그래픽적으로 풍부하고 다감각적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야하고,  관객에게 주어진 권한, 선택, 자유를 강조하며, 내러티브에 비연대기적이거나 인상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를 기준으로 시장극장의 공연을 살펴보자. 시장극장은 앞서말한 영도시장의 장소성을 제외하고 비어있는 점포와 시장의 구조만을 무대로 활용한다. 공연은 연대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관객은 그 구조를 충실하게 따라간다. 장면은 동시에 재연되지만 반복되지 않으며 희곡의 내러티브를 따라 진행된다. 따라서 공연시간은 약 한 시간으로 원작보다 상당히 단축된다. 아쉬운 점은 극의 시대적 배경 ― 원작은  20세기 전환점에 들어선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다.― 혹은 환경이 제시되지 않아 등장인물을 옳아매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과, 주인공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이 주변화되어 알마와 존의 고뇌의 층위가 다소 단순해졌다는 점이다. 관객이 자유롭게 여러 공간을 감각할 수 없다는 것도 기존의 이동형 공연과 구분하기 다소 어려운 지점이다.

 

이머시브 씨어터는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방식의 하나로써 창작자와 기획자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관객참여형공연’의 효과로 자주 언급되는 ‘공연 참여를 통한 능동적 주체성 회복’의 허상에 대해 지적한다. 또한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The Emancipated Spectator)≫ 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행위를 수동적인 행위라고 보는 것에 반대하며, 보는 행위 역시 능동적 형태의 참여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관객은 개개인의 해석이라는 행위를 거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연구자들의 의견을 빌지 않아도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매체들을 제쳐두고 굳이 ‘극장’이나 ‘공연예술’을 찾아오는 관객들은 이미 매우 능동적인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국내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관객참여형공연이 과연 관객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창작자들의 불안감 때문에 오히려 관객을 성가시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나는 시장극장에게 그들이 가진 ‘문제의식’ 또는 ‘질문’을 던지는데에 있어 이머시브 씨어터의 형식이 적절한 것인지, 혹은 공연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적절한 것인지 질문하고 싶다. 물론 모든 창작자가 어떠한 문제의식이나 질문을 가지고 공연예술의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극장의 공연이 놓여있는 맥락을 살펴보면 결코 희곡을 미학적으로 재연하는것 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

 

무엇을 위한 스쾃인가

 

시장극장은 동작문화재단의 청년예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스쾃 - 재미가 혁신의 시작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본 사업은 공공단체가 공간의 점거를 지원하는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스쾃’이 그 태초의 정신과 분리되어 이미지 혹은 기획의 타이틀로 소비되기 시작한때가. 어쩌다가 ‘스쾃’이 ‘스타트업’에 어울릴법한 조합 ‘재미+혁신’의 수단으로 차용되었을까. 여기서 ‘빈 공간’이라고 상정된 곳은 ‘영도시장’이다. ― 동작문화재단에서 제시한 네 가지 장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도시장은 비어있지 않다. 곳곳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비록 그곳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투쟁중인 시장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현수막에 쓰여있는 메세지는 직설적이고 단호하다. 처절하고 구차하다. 시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빈 공터에는 ‘소변금지’라고 쓰여있다. 낙후된 이곳을 사람들이 어떤식으로 점유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남아있는 사람보다 떠난 사람이 더 많은 영도시장은 그 자체로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의 풍경은 공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게 만들고 계속 그곳의 사람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사진_'시장극장'제공(김계식)

 

 

시장극장이 제시한 공연에 대한 안내사항 중에는 시장이기 때문에 극중에 시장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내용이 있었다. 실로 극을 보는 와중에 시장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알마와 존의 마지막 장면 너머로, 한 노년의 여성이 허리를 숙이고 대야에 담긴 물에 머리를 감고 있었다. 시장극장은 이렇게 침투하는 강렬한 이미지를 소외 시키지만 끝끝내 실패한다. 재개발을 앞둔 지역에는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갈등을 빚지만, 아무도 곧 사라질 공간을 정리하거나 손보지 않는다. 따라서 재개발 지역은 급속도로 슬럼화 된다. 사람이 살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재개발 지역의 위험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을 빠져나간다. 그나마 다른 옵션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결국 갈 곳 없는 이들이 남아 지리한 싸움을 계속한다. 재개발이 결정된 건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상태를 지연 시키는 사람들. 어쩌면 그 사람들이 재개발을 절대적인 목적지로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삶. 자신의 고통을 앙상한 현수막에 적어 매다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등돌리는 예술가는 많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이다.

 

세계의 스쾃 연대인 '스쾃넷(www.squat.net)'에 작성된 ≪스쾃 A에서 Z까지(Le squat de A à Z)≫1에는 예술가들 스스로 스쾃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공유하고자 하는 단락은 다음과 같다. 

 

스팟의 실천과 이론은 점거자들의 정치·사회·경제·법률·상호관계 등의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지만 모든 스쾃은 ‘정치적’이다. 일반적으로 스쾃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부르주아들에 의해서 버려지거나 방치된 공간을 선택하기 때문에 본의가 아닐 때라도, 사회질서와 사적 소유권 전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쾃은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다. 스쾃의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쾃이 저항과 실험의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스쾃은, 그것을 만들고 자율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사유를 준다. 

 

스쾃 예술가들은 모든 스쾃이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공간이 지니는 정치성과 그 공간 속 사람들의 정체성 혹은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작업에 반영될 수 밖에 없다. ‘공공영역’의 지원에 기반한 ‘스쾃’ ― 그 장소까지 지정받은 ― 이를 수행하는 ‘청년 예술가’ 그 방법으로서의 ‘이머시브 시어터’. 청년 예술가로 지목받는 ― 오늘날 이곳 저곳에서 쓰임 당하는 ― 우리는 마땅히 이 모순된 조합들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창작자로서 어느 곳에,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서 있는 것인가. 만약 시장극장이 의도적으로 이를 외면한 것이라면 이유는 무엇이고, 그것은 공연에서 어떻게 표현 되었는가. 따라서 나는 묻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왜 <여름과 연기>인가”를.  

 

지금은 이대로는 불편한 테네시 윌리엄즈의 <여름과 연기>

 

<여름과 연기>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 금욕적인 삶을 살며 영혼의 존재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알마 와인밀러’와 그와는 반대로 쾌락을 좇는 의사의 아들 ‘존 뷰캐넌’의 관계를 다룬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사랑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하고, 각자가 추구해왔던 삶과는 정 반대의 선택을 하게 된다. 사고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존은 여성 편력을 끝내고 알마의 제자인 넬리와 약혼하고, 알마는 존이 그랬듯이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오늘 날 <여름과 연기>는 불편한 지점이 있는 공연이다. 알마는 존에게 의해 지속적으로 대상화 된다. 각성한 알마가 존을 찾아가서 자신의 욕망을 존중하겠다고 말할 때, 존은 이전 그대로 있어 달라고 한다. 영혼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알마가 옳다고 말한다. 대상화된 자신을 박차고 나와 스스로의 욕망을 들여다보려는 존재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말한다. 본 공연에서 알마는 존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정면으로 받지 못하고, 존은 그런 알마를 집요하게 바라본다. 넬리는 등장할때마다 먼곳에서부터 양식화된 걸음거리로 달려온다. 알마의 어머니가 보이는 증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극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캐릭터를 억압하는 환경을 공연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 - 알마로 이어지는 단순한 정신병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존의 상대였던 로자는 창녀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사회적 맥락을 벗어난 네 명의 여성 캐릭터는 불안정하고 지적으로 열등하게 그려진다. 원작대로 ‘시장극장’은 충실하게 희곡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대상화한다. 

 

 

사진_'시장극장'제공(김계식)

 

 

존은 카지노에서 곤잘레스에게 큰 빚을 지고 그의 딸인 로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알마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뷰캐넌 박사가 로자의 아버지 총에 맞아 사망하자 로자의 존재는 존의 인생에서 손쉽게 사라진다. 존은 로자의 집안과 결합하는 것을 원치 않아 괴로워 했었다. 결국 알마가 존의 인생을 구한 셈이다. ― 희곡이 곤잘레스와 로자를 다루는 방식에서 멕시코인을 향한 인종차별적 태도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며 고백하던 존은 자식뻘 되는 넬리와 약혼한다. 원작에서 떠돌이 세일즈맨과 카지노로 떠나는 알마의 모습은 당시에는 ‘쾌락’ 혹은 ‘나락’으로 빠진다고 해석되었지만, 지금의 시선에서 알마의 선택은 자신을 긍정하고, 용기내어 한 발을 떼는 장면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극장에서는 이 장면을 들어내고 알마와 존의 마지막 대화로 끝을 맺는다. 아마도 이것이 <여름과 연기>에 대한 시장극장의 해석일 것이다. 시대는 변했다. 특히 우리는 미투(me too) 이후 근 이 년 동안 고통스럽게 연극계 안에 존재하는 폭력적인 관습들을 들여다 보았다. 관객의 감수성도 이전과 다르게 섬세해졌다. 우리는 또 다른 가능성 앞에 서 있다. 기존의 가부장중심, 남성중심 서사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읽어내는 희곡은 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희곡을 읽고 재연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고민이 요구된다.

 

시장극장의 공간 연출력은 탁월했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흩어져있는 관객을 장악하기에 충분했다.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감각적인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시장극장이 선택한 장소는 재미나 혁명을 말하기엔 치열하고 현실적인 삶의 공간이고, 스쾃, 이머시브 씨어터와 같은 단어들은 도리어 시장극장의 발목을 잡는다. 창작자는 개념과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난 가장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낭만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포기하지는 말자.) 장르를 구분짓는 것은 공연을 기록하는 이론가들의 역할이 아닐까.


1. Le squat de A à Z, mais il manque encore plusieurs lettres…,www.squat.net, 2001,재인용;김강, 2008

필자소개_채 민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계속 이럴 수 있다면 좋을텐데...

 

사진_'시장극장'제공

 

1. 창작자 소개

<서울청년예술단 X 동작구 선정자 - 강현주, 문하나 >

2019년 지역형 청년예술단 지원사업에 동작구 청년예술단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대학로 등지에서 꾸준히 연극 작업을 해오던 청년예술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고 싶었던 공연을 해보려 합니다.

 

2. 프로젝트 개요

사라지는 영도시장

영도시장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76번지에 위치한 재래시장입니다.

1968년에 문을 열어 80년대까지 매우 호황을 누리며 사람냄새로 가득한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50년이 넘는 역사를 뒤로 하고

이곳에 동작구 복합행정타운이 들어서게 되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영도시장의 마지막을 함께 할 공연을 펼쳐 보고자 합니다.

 

공연내용

 

             ‘영도시장'의 구조적 특성과 관음적 특성을 살려 이머시브 공연 만들기

                                 소외된 공간에 예술을 끌고 들어가기

                                     삶과 예술이 중첩된 공간 만들기

 

테네시 윌리엄스의 <여름과 연기>를 주인공 두 사람 개인의 시점으로 분리시켜 동시에 두 공연을 진행한다.

서로에게 욕망을 품지만 관점의 차이로 인해 평행선 같은 관계에 있는 ‘알마’와 ‘존’.

관객은 공연이 시작되면 주인공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해 그 인물을 따라다니며 공연을 관람한다.

두 인물이 만나는 장면에서 관객은 인물을 재선택할 수 있고, 마을 사람이 되어 극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정보의 양이나 몰입의 대상이 달라지므로 관객은 각자 자기만의 결말을 갖게 될 것이다.

 

본 공연은 서울청년예술단 사업으로 무료공연으로 진행됩니다.

‘영도시장’ 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동형으로 이루어지는 공연으로 관람객 수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선착순 예약으로 관람객을 모집합니다.

또한 현재 재개발이 예정된 장소 특성상 공연 장소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