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아티스트창작워크숍spark | 7인의 스파커-3

2009. 9. 23. 14:16Feature


7인의 스파커 ③

부제-무의식을 살려내어 행복하게 살어보자!


돌아왔슴다!

하하하하?

장시간 연재를 쉬는 바람에 이게 무슨 글인가 하는 분들, 분명 계시다. 푸 추얼 핸접!

그 분들을 위해. 이 글은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주최로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진행한 아티스트 창작워크샵인<SPARK 스파크>의 진행상황을 녹화중계하는 장임을 알려드리며.

지금은 9월. 이러다 연중 상시로 글을 계속 쓰게 될 지도 모르는 일.

의도하지 않게 글쓴이(나, 김정현, 스파크 참가자 1인)의 삶과 맞물려 글쓰는 기간이 늘어나니 이것을 다큐멘터리적 글쓰기라 하면. 구차하겠지만 나는 워낙 형식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터라 그렇게 변명 한 스푼 넣어 이 새로운 형식을 떼 쓰듯 주장하는 바이다.

연재가 다소 길어졌지만 그래도, 그래도! 믿고 기다려주신 그 분께 이 글을 바친다.

혹시 그 분이 인디언밥 편집부의 그녀이거나 그여도 좋다. 무조건 좋다. 아 좋다~ 아~ 좋다.

저번 연재에 이어서 이번 장에는 스파크의 중심이 된 텍스트로 문을 열어볼까.


5년 전에 쓴 짧은 소설인<벙어리 시인 이야기>를 스튜디오로 가져와 읽어보니

소설 속에는 여러 상징들이 있어 7인의 스파커들의 다양한 해석과 표현의 여지가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채택.

나로선 가문의 영광. 보컬지망생에서 작가지망생으로 꿈을 하나 더 늘림.

5년전 돌끼로 쓴 소설이 빛을 발휘한 바. 깨달은 즉슨,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글을 남긴다!

이 글은 벙어리 시인이 <프랑스>라는 이름의 정신병원에서 시를 쓰는 내용의 소설인데.. 사실상 스토리를 줄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소설의 전문을 여기에 싣도록 한다. 이것은 읽는 이의 궁금함을 풀어주어 이 땅의 화병을 줄이고, 스파크의 쇼케이스와 공연을 부러 보러 오신 관객들을 위함이다.




< 벙어리 시인 이야기 >

10년을 시종일관 순간처럼 시작하고 기다려온 시인에게 인생은 코메디다.
 

수수께끼속에서 그는 모든 감성을 깨워 열중한다.



<모든 것은 수수께끼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최근까지>결론을 내려선 안된다.

수수께끼는 아프리카의 외딴 정신병원 -병원의 이름은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돌담으로 둘러쳐진 그 곳을 여름마다 시인이 들른다.

여름이 가득한 프랑스에선 실리콘으로 남자의 페니스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여름엔 실리콘들이 공교롭게도 녹아내리기도 한다.얼핏 낭만스럽기까지한 이 곳에

피터라는 남자와 시인의 이혼에 대한 호기심으로 병원을 탈출하려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탈출의 문제는 가능한 상징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호기심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시인과 과거의 남자, 피터의 낭만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시인은 여름마다 병원의 테라스에 서서 과거의 남자를 기다렸다.

모든 눈물을 열중하여 남자를 위해 흘렸다.

발랄하던 시인은 인생의 아무렇지도 않을 지루함에 눈물을 이어갔다.

아프리카의 여름은 실리콘으로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지만 시인은 시종일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인생의 행복은 호기심으로 시작하고 타오르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의 호기심, 인생의 신화, 모든 진정한 순간은 과거로 사라졌다.

그녀에게 남은 건 눈물.

가능한한 열중해 흘리는 눈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발랄하던 시인의 입에는 실리콘이 들어간다.

그녀의 눈은 앞을 향하여 행복을 바라보지만 시인의 입은 과거로 탈출했다.

탈출이 시도된 문은 봉쇄되어야 한다. 실리콘은 때론 녹기도 하지만 시인의 실리콘은 지루할 만큼

분명히 기능한다. 양초처럼 바로 선 남자의 실리콘은 흘러내릴 높이가 있어도, 그녀가 입속에 머금은

실리콘은 녹아 흘러내려도 굳는 곳은 결국 시인의 입안일 뿐이다.

녹고 녹지 않음이 지루할 만큼 의미가 없다. 피터의 문제는 상징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과거의 남자, 피터는 최근에 과거로 탈출했다.

프랑스에는 곳곳에 실리콘이 세워져 있어 다들 돌아가버린 파티장 같다.

-파티장에는 곳곳에 신비롭게 불을 밝힐 양초들이 세워져 있지 않는가.-

과거의 낭만을 기억하는 프랑스.프랑스의 테라스에 서서 피터는 아니다.

그녀, 시인은 앞을 보고 순간을 쓴다. 시인과 피터에 대한 호기심에 탈출한 사람에 대해 쓴다.

10년을 시종일관 여름이면 프랑스로 시인이 돌아온다.

결국 호기심으로 세워진 실리콘 병원은 현재로 돌아오는 이들이 스스로 들어가는 곳,

현재의 집이다. 과거로 탈출한 이들은 그들이 프랑스에 세워둔 실리콘페니스로만 기억된다.

여름마다 프랑스로 들어간 시인은 본 것을 쓴다. 시인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보고 쓸 수 있다.

실리콘은 사라지지 않고, 테라스에는 아프리카가 보이므로.

봉인된 입 안의 시간은 벙어리 시인을 신화가 되게 하였다.  과거는 실리콘으로만 기능한다.

하나의 호기심, 인생의 신화, 모든 진정한 순간은 프랑스에 세워질 것이다.

벙어리 시인은 여름이면 프랑스에 간다.





이 글을 토대로 스파커들은 재빨리 몸을 날려 첫 시도를 ‘시도’한다.

홍연출님은 이 소설의 배경인 정신병원, ‘프랑스’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주목하고 나는 그것을 구부러진 몸으로 실연한다. 그리고 영재출신 지현씨는 자신이 갖고 있던 영상소스중에서 텍스트와 부합하는 연기영상을 움직이는 몸에 프로젝션한다. 회의 내내 말이없던 재명씨는 신이 난 듯 건반연주와 더불어 장면에 어울림직한 음악을 선곡한다. 굿초이스!

이 기적적인 조합이 일어난 날은 2009년 6월 26일 금요일 밤. 스파크의 둘째날이었다.

여기서 우리만의 언어가 생겨났는데 이는 일명<폐허 씬>.

소설 속 정신병원의 분위기가 폐허, 혹은 패망 왕조의 궁 같다는 의미로 해석된 것이다.

이렇게 A4 용지의 잉크가 현실 속으로 불쑥 몸을 내보이며 들어왔다

무언가 시작된 이 날 이후부터는 어떤 식으로 우리의 작업이 풀려 나갈지 개요를 정하지 않은 채 지도없는 여
행놀이를 시작했다. 죄책감 없이 상상하기!. 한계없이 풀어내기!

   


   
   


                


                        
 



그리고 어느 날엔가 <벙어리 시인> 소설에 나온 아프리카의 풍광이 이럴 것 같다면서

홍연출님이 앙리루소의 그림 몇 점을 선보였고, 스파커들은 이 그림이 주는 묘한 신비감에 매료되어 작업에 들여온다.

투명해 보이기 마저한 새하얀 말이 프레임 한 가운데 춤추듯 있다.

자세히 보니 다른 동물에 목덜미를 물린 채 사로잡힌 채 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말의 까만 두 눈. 이내 말을 덮칠 듯 조여오는 시퍼런 정글.

순수하고 농염한 야생의 그것.




루소의 이 그림(우리는 이 그림을 아프리카 라고 불렀다.)을 지현씨, 프로젝터로 벽에다 상영을 해보니 그 공간감과 이야기성에 압도될 정도였다.

사실은 당장 이 그림을 가지고 무언가 조작해보는 것보다 글이 공간으로 확장된 것, 그래서 소설 속 아프리카가 더욱 풍성해진 것 그 자체가 굉장히 중요했다.



일련의 과정이 주는 매순간의 기쁨과 더불어 ‘좋아....그렇다면?’이라는 의무적, 본능적 물음에 답하고자 스파커들은 꽤나 고군분투 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즐거움에 원류를 둔다는 걸 전제로.

사실 스파크 기간 동안 서로에게, 자신에게 계속 주문처럼 ‘과정중심’을 되새겼지만 실로 완성도에 대한 욕심은 본능이었다. 텍스트라는 무제의 덩어리를 종이 밖으로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말이다.

한편 우리는 이 기간동안 각 장르의 작가들이 가진 자신들만의 언어가 들어갈 방을 고르는 일을 한 셈이다. 그 방에 머무르는 동안 또 다르게 언어가 성장해 나가리라. 또 하나의 시도로서 소설 속 실리콘이 녹아내리는 이미지와 시인이 흘리는 눈물의 이미지, 즉 흐름과 물의 느낌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위에 있던 투명 플라스틱 페트병도 좋은 소품이 되어 주었다. 때론 작업공간이 작업을 결정한다. 아니 많은 순간 그러하다. 프린지스튜디오의 하얀 벽, 의자, 빛, 냄새까지.
실로 작업공간은 제 3의 멤버다.

영상, 분위기, 움직임을 구현하는 과정 중에 여실히 느낀 것은

영상과 함께하는 몸.

몸과 함께하는 영상.

이 둘이 공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냥 해보는 것? 역시 좋다. 진짜 놀이하듯 진지하게 잘 논다면 모든 건 이유없이 공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은 개별성질의 무용도 아니고 그저 비디오 프로젝션도 아니었다.

가상현실인 영상과 구체화된 실재인 몸이 같이 만들어내는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세한 감각의 틈을 벌려 낼 수 있다.

이것을 알고 쓰는 것이 이유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가변형의 매체와 몸의 결합을 통해

관객과 행위자가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더욱 친밀하게 접속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벙어리 시인>텍스트로 돌아오자면 이 글은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생에서 불어오고 불어나가는 뜨겁고 차가운 바람을 시로 표현 해내는 이야기다.

이것을 토대로, 쓰는 것에 대한 집착을 몸으로 표현해 보았다.

언어와 몸, 문학과 춤이 또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을 자신의 몸에다가 글씨를 쓰는 한 사람. 그리고 또 한사람. 서로의 몸에 글씨를 집착하며 써 내려가는 두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와 홍연출님이 몸으로 시도했다. 여기에 영상은 지현씨가, 음악은 재명씨의 라이브연주다.

..이것은 춤이 될 수 있겠구나..이야기를 품은 움직임 말이다.


 


     


            
 

            

이렇게 5일동안 텍스트 내외의 호기심을 제약없이, 때로는 편안하게 풀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을 7인이 함께하며 많은 것을 나눴다.

특히나 도재명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다같이 감상한 시규어로스의 다큐멘터리 <헤이마>의 감흥은 오래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아몬드를 씹으며 감탄사를 연발하다 나중엔 질투에 휩싸여 모두가 잠시 작업불능상태에 빠졌던 시간도 오래오래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그리고 김지현씨가 존경해마지않던 존 마에다 선생님.

그림판으로 선보여졌던 그의 진지한 카리스마. 언젠가 그를 길에서 마주칠 것만 같다.

이렇게 해서 진정 하는 것인가를 계속 의심하던 쇼케이스를 6월 30일 월요일 밤 12시 그러니까 화요일 0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8월 8일에는 퍼포먼스페스티벌에 <벙어리시인>으로 공연을,

그리고 8월 24일에는 클럽 빵에서 다시한번 버전업된 쇼케이스 공연을 했다.

과정중심은 결과의 점으로 돌이켜 완성될 수 있었고

거대한 공연의 무게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호기심에 충실했던 시간이었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반짝이는 눈을 보여준 덕에

7인의 스파커는 외롭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움 가득 안고

다시 7인이 7색으로 흩어질 수 있었다.

쇼케이스 이야기를 이 연재의 마지막 꼭지로 한번 더 하려 했으나

모든 것은 신비로운 기운으로 사라져야 함을 알기에.(속으로는 못내 아쉽다)

진리를 따르기로 했다. 6월30일 프린지스튜디오에서의 스파크 쇼케이스 사진으로 대신한다.







안녕~

럭키세븐판타지~

비가 내리면 우리는 저 하늘에서 무지개로 만나요~

 

예술가들의 도전과 모험에 대한 권리,
아티스트 창작워크숍
SPARK 1st 


전시나 공연 등의 결과물 지향적 성과가 아닌 창작 과정에 집중 다양한 전개와 소통방식을 집중적으로 개발한다 특정 장르를 구심점에 둔 원근법적 창작이 아닌, 개별 장르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다초점적 시도 중심적 장르를 위해 결합하는 공동작업 방식에서 예상되는 귀결점이 아니라 다른 관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규정된 답이 아닌 다양한 질문을 유도한다
막연한 답보다는 명쾌한 질문들을 서로에게 던짐으로써 발상의 전환점을 만든다 하나의 완성품이 아닌 다양한 시도를 통한 예술적 도전과 모험에 기반을 둔다 참가자들이 여러 방식으로 매칭되어 환경과 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다 개별적 고립적 창작활동이 아닌 총체적 경험을 우선시한다 공동 창작 워크숍은 창작자들의 교류와 확장을 매개하는 공간이므로 총체적 경험을 통한 표현 언어 개발을 다각적으로 시도하도록 한다

공개 쇼케이스
* 2009년 8월 24일(월) 20:00 까페 빵
* 김정현, 김지현, 도재명, 박진원, 홍은지




김정현  /   imthinking@hanmail.net

공연을 연출하고 안무한다. 

즉흥그룹<임프로드 바닥>의 일꾼이자  춤꾼이다.

춤추고 노래하고 글쓰고 무언가를 만들며

사람으로의 진화를 꾀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