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적극 ‘감염’ 권장, ‘사이 바이러스’

2010. 3. 11. 15:46Feature

적극 ‘감염’ 권장, ‘사이 바이러스’

스카링


- ‘사이’는 무슨 뜻이에요?
- (씩 웃으며) 사이요. 너와 나, 우리 사이할 때 그 사이.


  끼리끼리라던가 또는 모든 이를 이해한다는 넓디넓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어떠한 기준 없이 그저 너와 내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 사이가 말하는 사이의 의미, 사이라는 사람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였다. 짧은 공연이 끝난 뒤에, 사이는 남은 이들의 팬심 가득한(?) 요청에 허허 웃으며 언플러그드로 노래했다. 단순한 기타 코드, 어딘지 맹한 소리의 클래식기타. 그러나 이를 뛰어넘는 것에 이끌려 나를 비롯한 몇몇은 자석에 달라붙는 물질로 변해버렸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전하고픈 의미가 선명하게 들렸던 적은.

 
먹다보면 금방 친해진다는 우리네 훈훈한 정서를 따라, 사이와 함께 사이좋게 비빔밥과 케이크를 나
눠먹었다. 사이는 맛있게 잘 먹었다.낯가림 지수 A급인 나조차 그 모습에 자동방어가 해제되어 쩝쩝거
리며 먹었다. 사이가 어떤 사람인 지 궁금하지 않은가? 귀농 뮤지션? 슈퍼 백수? 진보주의 민중가수?
에세이스트? 선생님?

 
내 안에 정의된 언어로 설명하겠다. 3단계에 걸쳐 나는 ‘사이’라는, ‘움직이는 예술가’에게 감염되었
다. 들어는 봤나? ‘사이 바이러스’라고.


1단계 - ‘사이’를 알다.





▲ 인디언밥 프리뷰에 올라 온 사이의 공연 동영상 (캡처)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09년 9월 다섯째 주 프리뷰에서 편집장 매버릭은 ‘사이’라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듣보잡의 뜻 아님. 지금은 매버릭에게 무한 감사!) 뮤지션을 소개했다.
(프리뷰보기
사이의 블로그 발췌문과 매버릭의 덧댄 감상. 이 오글거리는, 이상적인 말들은 뭐지? 동
영상을 재생시켰다. 보자마자 풉.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신선한 재미와 반가움에 대한 내 고유의 반응이
다. 장기하와는 다른 맛의 제 색 강한, ‘이상한’ 뮤지션이었다. ‘와, 노래 참 못 부른다. 근데 자꾸 듣고
싶어. 왜지?’ 웬일로 가사가 귀에 잘 들어왔다. 인디 씬을 비롯해 여타의 음악에서 좀처럼 접하지 못 했
던 내용. 그런 단순 호기심에 사이의 블로그를 훑어보았다. 일기와 농담, 노래가사 등이 버무려져 있는
그 온라인 공간에는 진짜 사이가 있었다. 자기감정 전시가 난무하는 블로그들 사이에서 사이는 흔들림
없는 자기줏대의 뿌리를 내리고, 무척이나 명쾌한 글을 조각조각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테면, 이
런 글들.


...나도 가능한 인간이 없는 곳에 살고 싶어서 산청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난 뒤에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은 혼자 살 수도 없고, 혼자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인데, 세상 모든 것이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나아닌 것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남이 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 안에는 인간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것은 오른팔만 사랑하고 왼팔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한동안 산청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속세에서 사람들과 좀 부대끼면서, 왼팔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밤 매실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러기에 여기 악양은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다.


- 사이가 하동으로 간 까닭|(2009.6.23 사이가 블로그에 올린 글 중 일부) -

 
  (이걸 읽고 박필성이라는 사람이 왜 ‘사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는지 단번에 꽂혔지만 구태여 직접 만나 물었던 건, 확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터(writter)인가? 아니면 싱어송라이터인가? 글은 정말 탁월한데, 음악은 글쎄...수려한 멜로디라
인에 오랜 세월 취해 살던 나는 사이의 필력에는 반했으나, 음악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몇 차례 사
이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죄다 놓쳤고, 그러다 겨울이 오면서 그만 그를 잊고 지냈다. 사이의 잘
못이 아니다. 끈덕지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2단계 - ‘사이’를 만나다.

 



▲ 살롱 바다비에서 만난 사이

 
만남은 생각지 못한 때에 찾아왔다. 2010년 1월 31일 일요일, 눈여겨보던 살롱 바다비에서 ‘일요 시 극장’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곧바로 인디언밥 프리뷰에 이 소식을 실었다. (프리뷰보기)  어둑어둑한 지하, 거기에 색다른 자유가 있다지. 어떠한 형태로든 좋다, 자작시를 발표해보자는 취지의
월 1회의 무료공연이었다. 음, 재미있겠는데 하고 쭉 내려 보다 발견한 이름 ‘사이’. 두근거렸다. 마침
시간도 비어 있었다. 그러나 도통 용기가 나지 않아 가끔 인디언밥에 글 쓰는 필자 ‘개쏭’을 꼬셔서 함
께 바다비에 갔다. 뻘쭘해하며 들어가자마자 바다비를 이끄는 인디시인 우중독보행과 마주쳤다.

- 어서 오세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의외의 친절함(?)에 당황하며, 주섬주섬 나무의자에 앉았다. 그 뒤로 여러 사람의 시를 들었고, 마지
막 순서로 아기다리고기다리 사이가 등장했다. 빨강 하양의 니트 잠바에 청바지, 일자 청바지에 덥수룩
한 파마머리와 수염 그리고 뿔테안경. 그런 모습들이 사이라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었다. 간만에 만난
편안한 차림(?)의 뮤지션. ‘어서 노래를 들려줘요! 개쏭에게 그대를 유쾌한 귀농 뮤지션이라 소개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이는 이렇게 답했다.

- 먼저 여러분을 고문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이는 A4 세 장 정도 분량의 장문의 긴 글을 낭독했다. 헉, 벌어진 눈과 입 사이로 사이의 글
이 흘러들어왔다. 이건 뭐 노래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글 한 편이 사이를,
근래 만난 지상 최고의 사람 중 한 명으로 마음에 새겨지게 하였다. 내용은, 반딧불 관찰일지였다. 새
벽, 집 안으로 들어 온 반딧불 한 마리. 그 반딧불 한 마리가 사이의 생각을 헤집고 밝게 빛났다. 그 생
각들이 정리되어 쑥쑥 자라더니, 이윽고 커다란 바오밥나무가 되었다. 사이의 글엔 그런 힘이 깃들어
있었다. 반딧불에서 출발하여 반딧불과 인간의 언어를 생각하고, 너무도 다양하게 쪼개진 인간의 언어
와 역사를 짚어보다 반딧불처럼 반짝임만으로 온 우주와 소통하는 꿈을 꾸는, 그러나 다시 새벽녘 가족 품으로 돌아오는 사이의 일대기. 울고 싶어졌다. 이 사람, 그냥 가수가 아니야. 엉엉.

- 2009년 저의 화두는 긍정과 사랑이었습니다.

 
‘아니죠. 그 화두, 올해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사이는 시와 일기, 그리고 신곡 중심으로
무대를 이어나갔다. 이런 말 하면 실례지만, 하고 싶다. ‘혼자 잘 논다.’ 그런데 그 혼자 놀음에 하나 둘
달라붙기 시작했다. 굉장한 이끌림이었다. 그런 유쾌함이란, 보는 이 의식않고 손뼉 치며 친구들과 즐
거이 노래 부르던 코흘리개 시절과 비슷한 감상이었다. 얼굴 망가지는 것도 고사하고, 사이는 혼자서
악기와 사람을 벗 삼아 주어진 시간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마음이 먹먹할 때마
다 몰래 녹음한(!) 사이의 글과 노래를 즐겨듣는 버릇이 생겼다. 나만의 피로회복제랄까.


3단계 - ‘사이’를 초대하다.


 



▲ 프린지 사무국에서 열린 ‘마포동네단체탐방’ 중 (2010.2.24)

 
3단계로 가기 전 2.5단계가 있다. 사이의 1집 음반 해부작업이다. 초대하는 과정에서 미리 입수한 음반에는 암호해독수준의 북클렛이 들어 있었다. (훗날, 시안용으로 써 본 것이 그대로 북클렛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은 밑줄 좍 그은 가사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 사람들은 도대체 내 말을 믿지 않아. 돈 없어도 시골에서 팔자가 늘어진 걸.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고 전기세 1600원 (아방가르드 제 1장 중)

- 연신내에서 탔든 압구정에서 탔든 모두들 가는 곳은 결국 똑같다. (지하철 명상)

- 내가 부르는 노래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리로 치자면 냉동만두, 냉동만두
 
같은 거죠 (냉동만두)

- 우주는 아기 밥그릇 속에 악몽은 내 머릿속에 있다. 얼룩말은 아프리카에 사람은
  냉동실 안에 산다. (편지)

 
 
사회를 따끔하게 보는 안목과 가슴 뭉클하게 하는 감성이 골고루 함유된 영양 만점의 가사들. 글 창작
한다는 알량한 자존심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창작이
아니라는 이상한 믿음 탓이었다. 그런데
사이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멜로디보다 가사가 먼저
들렸고, 내 안의 깊은 곳에 담아두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앞서도 말했지만 처
음 있는 일이었다. 가사가 탐나서 음악을 더 열심히 들었던 적은 말이다. 가사만으로도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가더라. 허세라던가 꾸민 티가 전혀 없었다. 가사에는, 사이가 귀농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
연하면서 가진 생각들이 생생하게 녹아 있었다. 나는 소심하게나마 외쳤다. 유레카!



▲ 음악에 취한 사이만의 ‘표정’

 
만남에서 초대로 이어질 기회가 생겼다. 작은 모임이 잡혔고, 공연이 필요하다고 했다. 누구를 섭외할까, 하는 말들이 오가는 틈에 섭외와 거리가 먼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 사이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다들 멀뚱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 대한 반신반의였다. 다행히도 섭외는 생각보다 쉬웠다. 전화
가 부끄러워 이메일로 요청했는데, 바로 승낙한 것이었다. 올 초 가장 쉽게 풀린 일에 덩실덩실 춤이라
도 추고 싶었다. 음반 판매도 할 겸, 먼저 받아서 가장 먼저 그 중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앨범명
‘아방가르드’. 어울리는 이름이다. 내 이야기를 멜로디에 담아 유쾌 상쾌 명쾌하게 들려주기. 이것이야
말로 사이 나름의 혁신적인 예술표현이 아닌가. 그것은 곧바로 두고두고 듣고 또 듣고 있는 음반이 되
었다.

 
몇 차례 확인 겸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찾아 온 디데이 2010년 2월 24일, 드디어 사이가 사무국으로 찾
아왔다. 빨강 하양의 니트 잠바에 청바지, 일자 청바지에 덥수룩한 파마머리와 수염 그리고 뿔테안경.
바다비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였나, 안심했다. 바다비에서의 감동이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도
그대로 피어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들었다. 응접실을 꽉 메운 사람들 앞에서 사이는 덤덤히 있
다 씩 웃더니 노래를 불렀다. 사이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손
님들 얼굴에는 공감 백배의 감정들이 피어올랐다. 아쉽게도 식사 준비 마무리를 하느라 공연을 볼 수
없었다. 대신 귀를 활짝 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흥이 났다. 비빔밥에 들어 갈 계란을 부치던 중에 팔
에 튄 기름 때문에 눈물 쏙 빠질 것 같아도 견딜 수 있었다. 노랫소리와 박수소리가 연고처럼 상처 위에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보는 것도 바람이었지만, 사이와 말 한마디 제대로 해 보고픈 욕심이 앞서 있었다. 기회를 엿보
다 어설픈 팬 흉내를 내며 조건부 사인 (뒤에 나옴)을 받아냈지만, 그 다음의 이야기는 잘 이어지지 않
았다. 역시나 나의 낯가림 A등급이 문제. 이대로라면 사이와 인사만 하고 헤어질 터였다. 그러나 이런
내 간절함이 끝물이 되어 사이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보드게임이었다.

 
보드게임에 앞서 용기 내어 이런저런 질문을 꺼내들었고, 그러다 너무 흥분해버려 사이의 클래식기타
도 만지작거려보고, 심지어 노래도 요청했다. 그러나 사이는 참으로 태연히 웃으며, 망설이는 모습 없이 함께 있던 사람들을 위해 노래했다. 찡한 무언가가 코끝에 맺혔다. 그 분위기란, 흡사 우리 집 마루에서 기타 좀 친다는 삼촌이 징징대는 조카를 위해 머리를 긁적이다 열심히 불러주는 그런 것을 닮아 있었다.

  생일인 사람이 있어 같이 축하해주고, 보드게임을 하면서 웃다가 놀래기도 하는 사이의 모습에서는 정말이지 사이좋은 사람의 표본이 보였다. 너무 띄워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이다.
부산 사나이치
고는 부드럽고, 귀농한 사람이라기엔 세련되었다. 이것은 편견이 아니다. 오히려 사이 때문에
편견이 깨졌다. 처음 만나거나 여러 번 만난 사람들이 섞인 자리에서 사이는, 자연스레 너와
나의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솔직히 블로그나 노래를 통해 만난 글 전체에 공감하지는 않는다. 어떤 글은 지나치게 사회를 후벼 파
고 있고, 어떤 글은 도통 무슨 감성에서 쓴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이의 글이 참
좋다. 고민과 함께, 성찰하고자 깊이 잠수했다 수면으로 올라 온 흔적이 보인다. 사이의 글은 한 번 쓰
고 죽고 마는 글이 아니라, 계속 호흡을 하는 글이다. 그것은 식물의 호흡이다. 사이의 글이 산소로 변
해 내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시야가 맑아진다. 그런 글에 멜로디가 붙고 악기가 따라와서 ‘사이’의 분신, 노래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렇듯 알고 만나고 초대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사이와 연이 닿을 수 있었다. 이후를 지속하는 것이 이제는 내 과제렷다. 곧 2집이 나온다니 그걸 빌미로(?) 좀 더 길게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겠다. 그리고 블로그 염탐질도 계속 해야지.

 
혹시라도 ‘음악성’이라는 걸 걸고넘어지겠다면, 나는 곧장 딴지를 걸 것이다. 충분히 명분 있는 딴지
걸기이다. 사이의 노래 ‘당나귀 가는 길에 비단을 깔아요.’의 코러스를 따라 부르던, 그 마음을 증거로
내세운다. 어찌나 신이 나던지! 어떤 작품이 있다 치자. 우리나라는 작품보다는 그 작품을 쓴 사람을 먼
저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삶이 먼저냐 작품이 먼저냐 하는 논란은, 사이에겐 통하지 않는
다.
노래가 곧 사이요, 사이의 삶이 곧 노래다. 주변에서 이런 예술가 본 적 있는가? 그야말로
거대한 예술에서 소규모로 일상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요새 예술에 딱 맞는 모델이지 않는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단다. 동요를 많이 만들고 싶단다. 아이들과 함께 돈 안 드는 축제를 만들
어 보고 싶단다. 사이의 어린 아들 ‘느티’만큼이나 해맑은 마음씨다. 마음에 품고 있는 긍정과
사랑, 사이라면 분명 그것들을 계속해서 오롯이 음악과 글 안에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
에는 너와 나의 사이를 채우는, 유쾌한 전염성이 있다. ‘반딧불 이야기’ 요약한 내용을 사인으
로 해달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 이미 ‘사이 바이러스’ 감염자니까. 사이는 지금도 바
삐, 알게 모르게 ‘사이 바이러스’를 전염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 ‘반딧불 이야기’내용 요약본을 요청해서 받아 낸, 사이의 사인 (북클렛)


  - 반딧불은 말이에요. 우리가 잃어버린 본래의 말. 우리가 아직 포유류였을 때. 깜빡이면서
모든 것. 핵심은 이거죠. 누가 뭐라하든 나만의 세계를 완성하자. 그리고 “긍정과 사랑”→ 이
말의 본뜻을 되찾자! 2010.2.24 봄, 사이-


이제는 외워버린, ‘슈퍼백수 사이’의 블로그 : http://blog.naver.com/be2in



사진 ㅣ 개쏭(바다비), 피치(프린지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