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07:41ㆍ07-08' 인디언밥
'점거예술운동' 오아시스_기억의 재구성
- 무명씨
- 조회수 751 / 2007.07.11
#0.들어가며
막상 오아시스 프로젝트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니 기존에 오아시스에 대한 글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오아시스를 통해 점거예술에 대한 시각, 예술행동의 직접표현, 목동예술인회관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 등이 제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담론들이 만들어졌다.
오아시스에 대해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나는 오아시스에 대한 내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해 보기로 했다(나는 오아시스 프로젝트에 창여한 많은 예술가/기획자/활동가 중의 1명이기도 하다). 오아시스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지만, 현재의 이름으로 호출하는 기억은 현재에서 다시 재구성된다.
나와 오아시스, 에술과 오아시스, 사회와 오아시스... 경험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관계의 그물망을 짜본다.
#1. 오아시스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기억들
불법과 속임, 그리고 저항이 주는 다른 가치
나와 오아시스는 불법적인 활동에 의해 인연이 되었다. 인연이 되었던 2004년,나는 문화연대 활동가와 작가들과 함께 광화문 지하보도에 게릴라페인팅작업을 진행했다.페인팅은 집회와 시위문화를 제한하는 개악집시법에 저항하는 문화행동으로 공사중이던 광화문 지하보도를 새벽에 기습해 진행한 것이다. 당시 홍대 근처 카페시월에서 점거워크샵을 진행했던 오아시스는 “한국사회에서 예술점가 가능한가?”를 주제로 사회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좌담회를 준비하고 있었다.그리고 불법이었고 일시적으로 광화문 공간을 점유했던 나는 그 자리에 초대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토론이 끝날 무렵, 몇년째 공사중단으로 방치되었던 목동예술인회관 답사를 위한 ‘숨바꼭질’을 계획하게 되었다.‘숨바꼭질’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처럼 답사 또한 공사장 담을 넘는 불법적 방문이었다.그리고 사회의 기준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불법적인 활동과 권력에 대한 속임과 저항은 목동예술인회관 분양광고,사업설명회,입주페스티벌 등으로 계속 가시화되었다.불법적인 활동의 경험은 나와 사회에 다른 긴장감을 갖게 했다. ‘정상적인’,‘보편적 상식’을 강요하는 사회안에서 때로는 ‘정상적인’ 것을 거스를 수 있는 유모나 용기는 다른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인식하게 한다.무엇보다도 ‘정상적인’것과 ‘보편적 상식’에 대한 주체적인 정리와 판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정상의 본질과 보편성이라는 것에 감추어진 속임의 실체 또한 그렇게 발견된다.방법은 불법이지만 불법적 선택과 행동은 특정 질서에 균열은 내고, 균열을 통해 진실은 드러나기도 한다.당시 나는 사회적으로 불법적인(?)활동을 하며 다른 가치를 경험하고 있었다.
“할수만 있다면 합법으로, 반드시 해야만 한다면 불법이라도!”
(오아시스 동숭동 프로젝트 720자료집에서)
#2. 오아시스에 대한 예술의 기억 재구성
제도와 자기실천의 경계, 그리고 선택
오아시스프로젝트는 도심의 버려지고 방치된 공간을 예술행동을 통해 재생하는 예술점거 그룹이다.제도안의 예술, 개인적인 창작활동을 넘어 예술공동체를 꿈꾸며 사회의 변화를 지향한다.
지난 4년의 시간동안 예술점거 오아시스프로젝트는 예술의 영역에서 주요한 이슈와 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스쾃을 통해 예총의 권력에 돌을 던졌고, 예술인회관 문제를 공론화시켰고 마침내 사업비 국고환수가 결정되었다.그러나 아쉽게도 주체의 일상에 기반한 공간의 개입과 재구성,삶과 예술의 자기실천은 아직 진행중이다. ‘815목동예술인회관 점거’ 빈터 스쾃 ‘예술포장마차 오아시스’ ‘오아시스 동숭동 프로젝트 720’...물리적 공간의 스쾃은 일시적인 점거로 끝났고,참여자들은 일시적인 정서와 실천을 경험했고 기억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그리고 그들의 경험과 기억은 어떻게 현재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는가?
오아시스 예술점거의 사회적 실천은 또다른 아쉬움을 남긴다. 예총에 대한 문제제기, 목동예술인회관 국고 환수 결정이라는 큰 성과는 있었지만, 많은 참여자들의 에너지가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어 한국사회에 가능한 다양한 스쾃 모델을 함께 구상하지 못한 아쉬움이다.그래서 오아시스 초기 좌담에서 “한국사회에서 예술점거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또 누군가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예술점거는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방식과 선택에 있어서 일상에 기반한 자기실천의 문제가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오아시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재구성
불온한 점거를 통해 자본에 저항하라!
오아시스는 예술점거로 시작되었지만 사회라는 관계속에서 다른 의미와 가능성을 갖는다.이는 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만나 사회와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가능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스쾃은 공간에 대한 자본의 소유와 독점은 보호받지만,도시빈민의 거주와 생존권은 고려되지 않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공간의 부정의에 저항하며 공간 사용의 다른 가능성을 제안한다.즉 불온한 점거를 통해 삶의 가치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실험한다.
유럽의 사례인 스쾃은 이미 우리사회에서도 존재한 활동이었다.거주지가 필요한 노숙인,빈민자들이 이미 불법으로 특정 공간을 점거해 생존하고 있다.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예술점거의 사례만큼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그나마 예술점거라는 화두가 공간의 소유에 대한 문제, 주거에 대한 공간과 자본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은 자본이 축적되는 장이자 계급관계가 재생산되는 곳이다.따라서 사회의 변화는 공간에 대한 상상과 실천이 함께 가야한다.이런 의미에서 예술점거는 주체의 일상과 영영과 사회표층사이를 횡단하며 목동예술인회관 사례와 같은 사회적 해프닝과 함께 주체 중심의 대안적인 삶, 다른 삶의 방식을 실험 및 실천해 가야 한다.그 실험과 실천의 사례를 통해 “한국사회 예술점거 가능한가?”라는 질문의 해답이 조금은 가능하지 않을까?
#4.그리고 오아시스 해단식 이후
나는 얼마전에 진행한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해산식에 다녀왔다.많은 스쾃의 생성을 위해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해산되었다.제도안의 스쾃이 아닌 일상에서의 미시적 실천, 주체들의 삶의 변화를 위한 점거를 기대하며 오아시스는 해산되었다. 해산식의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기대보다 적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 온 많은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오아시스라는 스쾃을 통해 만나고 소통되었던 직간접의 주체들의 경험과 기억은 어떻게 어디에서 재구성되며 생성의 힘을 갖고 있을까? 다시 한번, 예술점거이든 다른 어떤 선택이건 오아시스를 통해서 생성되었던 열정과 사회의, 일상의 변화를 위한 욕망들이 다시 상호교차 되는 것을 기대해 본다.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처럼 혼자 꾸는 꿈들이 자연스럽게 그물망처럼 엉켜 함께 꾸는 꿈이 되길 기대해 본다.*
(2004년 목동 예술인회관 점거 이후 참여자들과 함께)
보충설명
한국에서 스쾃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형성시킨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도심의 방치되거나 비어있는 공간을 예술로써 부활시키는 공간재생프로젝트이다. 점거워크숍(2004), 8.15 목동 예술인회관점거(2004), 한국사회예술점거 가능한가? 토론회(2004), 문광부앞 일인시위(2004-2005), 빈터 스쾃 '예술포장마차 오아시스(2005-2006), 오아시스 동숭동 프로젝트-720(2005), 주거하는 조각-스쾃(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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