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5월 레터] 도시의 기억

2013. 5. 18. 23:19Letter

 

도시의 기억

 

제가 서울을 처음 방문한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동생들과 함께 외삼촌을 따라 63빌딩에 갔었지요. 그리고 그 뒤 11년 후 두 번째로 서울에 오게 됩니다. 테헤란로를 걸으며 건물 규모를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높이보다는 넓이를 보고 서울과 지방의 차이를 실감했습니다. 제가 친구에게 했던 말은 돈 냄새난다!”였습니다. 비꼬는 게 아니라 감탄사였어요. 느낌표 보이시죠!? 지금이라면 어쩌면 비꼬는 투로 내뱉을 말을 그때는 감탄으로 쏟아냈습니다. 정말 어렸네요. 그 뒤로 8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저는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TV 속에서만 보던 서울이 아니라, 삶 속에서 서울을 보게 됩니다. 멋진 건물들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숨겨져 있는 초라한 주택과 상가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TV나 신문에서 보던 서울의 기억이 모두 진실이 아니었음을 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5월 초였습니다. 이때 저는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의 책에서처럼 국내의 도시들도 고색창연한 본래의 색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리고 여기에 예술가들이 일조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다소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마 지금이 5월초라면 그런 내용을 여러분께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5.18이 되었네요. 인터넷의 몇몇 기사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댓글들 때문에 어제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진국, 상념의 도시-2, 2008

우리 스스로가 어떤 도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기억하는 것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얻는 도시에 대한 능동적인 기억이라면, ‘기억되는 것은 체험이 아닌 어떤 매체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수동적인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본을 보고 기억하느냐, 복제를 보고 기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 매체에 포위당하다시피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도시를 기억하는 방식은 두 번째 방식에 더욱 가깝습니다. 이제 도시를 기억하는 것은 그 도시 자체가 내뿜는 아우라를 통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진, 영화, 또는 인터넷 댓글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등을 통해서 기억합니다. 그곳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아도 범람하는 이미지 덕에 멀리 떨어져서도 도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원본이 아닌 복제, 즉 실재가 아닌 가상을 통해 도시를 기억합니다.

광주는 도시 곳곳에 5.18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5,18에 관한 제 기억은 저곳에 시신을 묻었다, 저 길을 통해 도망쳤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다 모래시계촬영지였던 금남로와 영화 화려한 휴가의 촬영지였던 전남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보내다 보니, 당시를 그대로 재현한 도시를 거닐며 유사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더라도 저 역시 사건의 실재를 본 것은 아닙니다. 다른 도시의 사람들보다 실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을 뿐입니다. 이야기, 드라마,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와 실재 사건 사이 어딘가에 저는 있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드라마와 영화도 역시 예술의 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술은 젊은이들이 체험하지 못한 도시의 기억을 불러내어 우리가 볼 수 있도록 가시화시켜 줍니다. 예술가가 지녀할 것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진실을 가려낼 줄 아는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눈을 갖기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감히 말해봅니다. 이 눈은 남보다 뛰어난 감각적인 재능만으로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떤 것이 쓸모없다 판단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폐기처분되는 이 시대에 굳이 예술의 효용성을 따지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진실이 진실로서 드러날 수 있는 순간에서야, 가상의 세계일지라도, 도시가 드러내는 고색창연한 색을 실재에 가깝게 바라 볼 수 있을 거라고 여깁니다. 그러면 어떤 도시의 기억을 분노가 아닌 슬픔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13년 5

독립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전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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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 오진국 디지털아트  http://blog.daum.net/digitalart/12619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