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3월 레터] 선택받은 예술가, 선택하는 예술가

2014. 3. 19. 09:32Letter

 

선택받은 예술가, 선택하는 예술가

 

러시아의 배우이자 연출가인 스타니슬랍스키가 쓴 『배우수업』(영제 : An Actor Prepares)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 책은 연기에 대한 이론서인데, 연기를 지망하는 이들에겐 일종의 기본정석이지요. 특이하게도 이 책은 학술적인 논증대신 연기클래스에서 벌어진 사례들을 이야기로 풀어나갑니다. 마치 소설처럼 말이지요. 1인칭 화자인 열혈학생 바냐는 수업에서 겪게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요.

 

그리샤가 이의를 제기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점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희곡 자체에서부터 오셀로가 자살할 때 쓰는 종이로 만든 단검에 이르기까지, 극장에서는 모든 것이 허구인데, 새삼스럽게 진실성이 무슨 문제가 됩니다?”

토르초프 선생님이 달래듯이 말씀하셨다. “그건 사기라고 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쳐서 모든 예술은 거짓이요, 극장에서 다루는 모든 인생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낙인을 찍는다면, 자네는 그런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제 8장 “믿음과 진실감”(Faith and a sense of truth) 중에서, 신겸수 역, 예니(2001)

 

총 1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제일 핵심적인 꼭지를 하나 꼽는다면 위에서 언급했던 “믿음과 진실감” 파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선생님 토르초프는 학생들에게 ‘인물의 정당성’ 을 강조하면서, ‘믿음과 진실감’ 이 연극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임을 밝힙니다. 좋은 배우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배역의 생활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 SBS프로그램<힐링캠프>, 출연 배우들은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며 연극정신을 강조한다

 

토르초프 선생님의 입을 빌어,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가 연습의 시공간을 떠나있더라도, 일상의 생활 속에서 그 배역을 진실하게 탐구하고, 충실하게 훈련하며, 최종적으로는 닮음을 넘어 그 인물로써 살아갈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연기 예술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아, 이 책의 11장에는 “적응” 이라는 챕터도 있습니다. 여기서 토르초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연출선생님이 말하셨다. “우리가 이제부터 사용하게 될 이 적응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다양한 상호관계를 조정할 때와 목표 달성을 위한 보완책으로 사용하는 내적-외적인 인간적 수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적응이란 속임수를 말하는 건가요?” 그리샤가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첫째,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고, 둘째 다른 측면에선 보면 적응이란 내적 감정과 사상의 생생한 표현이기도 하다. 셋째, 적응은 배우가 접촉하고자 하는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켜준다....(중략)”

- 제 11장 “적응(Adaptation)” 중에서, 신겸수 역, 예니(2001)

 

책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습니다만, 『배우수업』의 ‘대화들'을 통해 제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배우의 믿음과 진실감, 혹은 배역의 생활화와 같은 예술적 대명제는 결코 아닙니다. 구구절절 와 닿는 선생님의 말을 뒤로하고 저는 딴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쓰여진 이 책에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학생이 한명 더 떠올랐던 것이지요.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요.

 

토르초프 선생님은 수업을 다 마치고 학생들을 바라본 뒤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2014년 한국에서 온 젊은 여배우 한명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실은 저도 배역의 생활화라는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배운대로 행동의 단위를 나누고 초목표를 설정해서 인물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연극을 틈나는 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연습실에서 연습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가야합니다. 아르바이트는 몇시간 동안 서서 많은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집으로 가서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안일이 끝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오디션 정보를 확인해야 하고요. 침대에 눕는 시간에야 비로소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고민하는 인물이라고 해봐야... 예쁜척하는 멍청한 여대생이거나 가슴을 훤히 드러낸 술집여자입니다. 배역의 생활화를 하고 싶지만, 저에겐 시간도, 여유도, 기회도, 배역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여배우는 이내 선생님과 배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연습실과 집만을 오가면서, 무대에 오를 시간을 기다리는 여러분에게 ‘배역의 생활화’ 나 ‘믿음’ 혹은 ‘진실감’ 은 열심히 하면 달성될수 있는 문제겠지만... 2014년, 한국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저에겐 아무리 해도 어렵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적응’ 을 잘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적응’ 을 다시 한 번만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가상의 이야기였지만, 저는 이러한 상황이 최근의 공연예술계의 젊은 배우들, 그리고 특히 여배우들이 처한 딜레마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적 작품에 소모적인 배역으로 출연하거나, 혹은 비상식적인 프로덕션에 참여하는 것. 이러한 ‘도구적 생존’ 말고, 주체로써 ‘살아 나가기 위한" 자발적 선택지가 이들에게 존재할까요? 타협을 거부하고 신념을 지키려고 할 때마다 고민은 더욱 복잡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차선책으로 '적응' 의 방법론을 택하겠지요.

 

▲ 케이블 방영예정<아트스타코리아>, 지원금1억, 해외레지던시, 개인전을 우승혜택으로 제공한다

 

예술계에 꽤나 복잡하고 거센 변화의 바람들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허나 이 또한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여 선택 '받은' 자들만의 몫은 아닐까요. 피부로 와 닿지 못하는 변화 속에서 외려 소외의 소외를 거듭 당하고 있는 연기 예술가들을 생각해봅니다. 이들은 등장인물의 생활화 대신 고통받는 인간의 내면화를 수행하고 있겠지요. 선택받은 예술가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무대가 아닌 곳에서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이유로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순수 예술분야에까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실시된다는 소식과 한 무명배우의 자살소식을 인터넷 검색순위에서 동시에 접하고 난 후에 쓰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쌀쌀한 3월, 인디언밥의 주제는 "선택받은 예술가" 입니다. 평온한 휴식을 바라는 맘으로, 죽음을 선택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맘으로, 서바이벌을 택한 예술가들에게도 행운을 빕니다.

 

2014년 3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정진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