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 @신촌극장

2018. 6. 21. 08:14Review


계속되는 그리고의 세계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

전진모 연출 / 신촌극장

 

_권혜린

 

부산한 소음들을 지나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선다. 쏟아지는 사람들을 갑자기 차단하기라도 한 듯이 주택가는 고요하다.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고요를 뚫고 조금 걸어가다 보니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한 극장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가 상연될 신촌극장이다. 제목과 어울리는 분위기의 극장을 향해 긴 계단을 올라간다. 하늘과 가까운 극장에 들어가 앉는다. 작품 속에서 기다리던 연극이 지연되는 것처럼, 이 작품의 시작도 지연된다. 친절하게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단 한 명의 관객을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보통은 공연 위주로 생각하는 편이지만 부드러운 분위기 덕분에 너그러워진다. 첫 줄이 아닌 자리에 앉는 바람에 무대 전체의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앞에 앉은 관객들의 틈새로 무대를 엿보는 느낌이 드는데도 심지어 괜찮다. 곧 공연이 시작되고 차분한 분위기와 느낌 속으로 편안하게 빨려 들어간다. 피로에 지친 몸이 긴장을 풀고 이완되는 시간이다.

 


흩어진 듯 이어지는

 

이 작품의 줄거리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특정한 줄거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베를린에 간 연극 연출가의 영상과 풍경들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들이 화면에 펼쳐지고, 무대에서 인물들은 자신이 봤던 공연이나 일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중간 중간에 작품 쓰기를 은유하는 듯한 기타 교습 시간도 끼어 있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분절되는 장면들을 흩어놓은 것 같지만 묘하게도 이 모든 것들이 이어지는 지점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처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뭘 써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등장하는 흑백 영상 속에서 연출가는 베를린에 가 있다. 그곳에서 공연을 준비하고자 하지만 먼 곳까지 장소를 옮겼음에도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다. 공연에 대해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것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발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롭다라는 말은 외국어처럼 기묘한 이질감을 주며 허공에 붕 떠 있다.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뒤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풍경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를린이든 한국이든 상관없을 것 같은 하늘, , 구름을 보고 있자면 제목에 나타난 구절이 담긴 시의 제목처럼 그저 소멸을 이야기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생각마저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끼어드는 힌트들

 

하지만 마치 도움을 주려는 것처럼 이 작품에 끼어드는 다른 작품들이 있다. 다른 작품의 인용들이 일종의 힌트가 된다.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인용한 벨라스케스에 관한 내용은 쓰고 싶은 새로운 것을 드러낸다. 벨라스케스가 50살 이후 사물을 그리지 않고 빛, 공기, 텅 빈 공간, 그림자, 색의 두근거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중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힌트로 이 작품에 삽입된 여러 사진들 역시 이를 찍은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식탁에 있는 물 얼룩들을 여러 각도로 찍는 등 이라는 사물에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물들도 매일이나 일상이라는 반복되는 말 대신 그 순간을 택하면서 날마다’ ‘다른 기분을 계획하고자 한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술자리, 대화, 사람들일지라도 그 장면들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기억하기보다는 오히려 흐릿하게 남김으로써 분위기만 퍼트리는 것이다. 어떤 뉘앙스나 느낌만 남는다.

기타 교습 역시 무엇을 써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기타 교습은 (1), (2)와 같은 식으로 나아가면서 연속적인 시리즈로 이어지는데, 첫 교습에서는 기타가 단순한 BGM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배경으로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배경과 중심의 자리바꿈을 통해 기타가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중심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생긴다. 집중하지 않았던 것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기타 소리 역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코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좋은 음들을 묶어 놓은 코드를 통해 구성되는 음들을 알아 두라고도 이야기한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고 하더라도 중심이기에 코드는 중요하다. 또한 반복 학습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것은 곧 소리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그리고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그러나가 아닌 그리고의 세계

 

새로운 것을 쓰고 싶다는 것은 이 작품 안에서 곧 특별한 것을 쓰고 싶다는 말로 번역된다. 이 작품에서 잦은 횟수로 등장하는 대사는 별일 없지?’라는 말이다. 흔히 안부를 물을 때 심상하게 쓰는 이 말에서 별일특별히 다른 일을 뜻하는 말이다. 사실은 특별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고, 새로웠으면 좋겠지만 일상은 늘 그렇듯 그렇고 그런 듯이 흘러간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그런데도 시간은 빨리 간다.

남은 것은 즉흥적인 지금뿐이다. 영상에서 대사를 썼다가 찢고, 계속 찢고, 그것을 이어 붙이기도 하듯이. ‘특별한공연이라고 하는 <Wallflower>에서처럼 정해진 대본 없이 이제까지 추었던 기억 속의 춤들을 기억나는 대로 그때그때 끌어내어 단 한 번뿐인 공연을 만들듯이. 이때 고백을 하기 전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뺐던 것도 하나의 춤으로 나타나듯이. 흐름이 뻔하지 않고 진부하지 않다고 하는 펜데레츠키의 음악처럼.

중요한 것은 그러한 지금들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기타 교습에서도 한 곡이 끝나면 더 어려우므로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쓰고 싶다고 말한 것을 다르게 생각할 여지도 생긴다. 특별한 것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늘 다시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그러한 시도들이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연출가는 영상 속에서 마지막에 노트를 의자에 두고 사라진다. 작품은 이라고 생각했던 극장을 옥상의 문을 열어 바깥 풍경을 보게 함으로써 으로 펼쳐지게 한다. 이렇게 안팎의 작품들을 열어 둔 채 공연은 끝난다. 주변 풍경들 역시 작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의 시 <소멸>에서 제목 바로 이전의 문장도 함께 말하고 싶다. ‘나는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 /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 ‘그러나가 자연스러울 것 같은 곳에 그리고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처럼 진실을 추궁하고 정확한 기억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처럼 흩어져 있고 퍼져 있고 숨 쉬고 있는 느낌과 감각들을 그리고, 계속, 다시 써 나가는 것이 연극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은 그리고의 세계를 부담스럽지 않게 보여 주었다. 덕분에 보는 입장에서도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보았다.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편안함이 묻어났다.


공연을 보고 난 직후에도, 다소 시간이 흘러 공연을 봤던 기억을 상기하는 지금도 공연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기는 어렵고, 그렇게 하기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내내 부드러웠다는 것뿐이다.



*사진제공_신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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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권혜린

 소개 : 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http://blog.naver.com/grayhouse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