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모든 유예된 것들의 지난한 아름다움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

2018. 6. 11. 06:09Review


모든 유예된 것들의 지난한 아름다움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

전진모 연출 @ 신촌극장

 

_김신록

 

모든 것이 도달하지 못한다. 기억에, 기대에, 정점에, 완성에, 만족에, 심지어는 시작에조차. 얼마나 무료하고 지난한 시간들인가. 그럼에도 매일은, 일상은 계속되고,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끼니를 먹고, 어딘가로 출퇴근을 하고, 친구라 부르는 누군가를 만나고, 공연을 본다. 무엇하나 흡족하게 느껴지지 않는 연속된 시간들 속에서, 그래도 밤마다 흰 공책을 펼쳐놓고 무엇인가 써보려고 끙끙대는 작가처럼, 혹은 그저 흰 공책이라도 펼쳐놓는 작가의 심정으로, 유예된 것들이 비로소 실현되길 기다린다.

 

우리 집에는 기타가 두 대 있다. 하나는 기타를 배우겠다고 낙원상가에 가서 직접 샀고, 사면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를 미래를 위해 카포도 샀다. 또 한 대는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자기 아버지가 치던 기타를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기에 남편과 둘이 나란히 듀엣 곡을 연주할 미래를 위해 내가 받았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나는 아직도 갑자기 찾아오는 텅 빈 자투리 시간에 기타를 꺼내 스케일을 더듬거리다, 만다. 그 시간이 어색하게 반복될수록 나는 어떻게 남들 다 치는 기타 연주곡 하나 못 치나하는 조급함과 무기력함에 휩싸인다. 또 한 대는 내가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하며 욕심을 부렸구나...’ 하는 자괴감 혹은 자책감과 함께 케이스 채로 철마다 집안 구석구석을 옮겨 다닌다.



스케일이 지겹다면 화음을 연습해보세요.

반복 연습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음들을 하나씩 혹은 한꺼번에 일정한 시간의 흐름 위에 올리는 것입니다.

포인트가 되는 부분만 연습하지 마시고 전체 곡이 좋은 울림을 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에 나오는 기타교습파트의 대사들 중 일부를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공연 제목은 진은영 시인의 시 <소멸>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 극의 작가이자 연출자인 전진모는 자신이 삶에 대해 느끼는 어떤 기분, 느낌, 뉘앙스, 공기같은 것들을 영상, 조명, 음향, 텍스트, 배우를 이용해 교차 편집하듯 무대화한다.

스토리가 완결되게 이어지거나, 인물들이 사건을 만나는 전통적인 극작술과 무대 구성에서 벗어나, 장면은 자꾸 단절되고, 정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완수되지 못한다. 툭툭 끊어지고, 끼어들고,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진행이 유예되는 형식 자체가 작가의 주제라면 주제를 가장 강력하게 전달한다.

수시로 끊기고, 사그라들고, 시작하다 말고, 하다 말고, 되다 말고, 그러다 마는 조각난 장면들을 퀼트처럼 기워보면, 흰 공책을 펴놓고 멍하니 앉아있는 작가의 반복된 밤이, 유예된 시간들이, 그 시간들의 온도와 습도와 색깔들이 스며들어 온다.

 


벨라스케즈는 오십 이후, 사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대상 주변을 맴돌며 빛과 공기, 텅 빈 공간과 그림자의 매력, 색의 두근거림들로 그의 고요한 교향곡의, 보이지 않는 중심을 만들었다.

 

작가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인용한 벨라스케즈에 관한 대사의 일부다. 리서치 차 들른 베를린에서 뭔가를 써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건만 결국 실패했다던 작가가 어느 밤 흰 공책 위에 마침내 적어 내려간 것은, 그리하여 연출자가 가까스로 무대 위에 기워 올린 것은, 그리하여 관객들이 아슴푸레 음미하게 된 것은, 단호한 진실이 아니라 빛과 공기와 텅 빈 공간과 그림자와 색의 두근거림이었다.


공연은 연출가 전진모가 자신의 동료들과 십시일반 하여 1년 전 개관하고 지금껏 운영하고 있는 소규모 극장인 신촌극장에서 올려졌다. 연세대 앞 샛길로 뻗은 좁은 주택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다세대 주택 대문에 신촌극장이라고 적힌 불 켜진 작은 간판이 걸려 있고, 간판 바로 옆에는 고지서를 토해내듯 쑤셔 담고 있는 작은 우편함이 붙어있었다.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건물 계단을 한 층 한 층 걸어 올라가자 옥탑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문득 극장이 나타났다. 베를린에서 매일 밤 펼쳐졌을 작가의 흰 공책처럼, 이곳에는 노란 조명 켜진 극장이 밤마다 펼쳐져 있었나보다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드디어 온 것처럼, 드디어 관객이 모이고 이내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흰 공책을 채웠다 지우고 지우다 찢어버리고 다시 흰 공책을 마주하는 영상 속 작가처럼, 공연은 씌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채워지다 찢겨진 페이지처럼 그렇게 끝이 났다.

 

한 곡을 완수했다면 또 다음 곡을 연습하세요. 한 곡, 또 한 곡, 그리고 다음 곡, 다시 다음 곡, 계속 하다 보면......(암전)

 

공연 끝에 배우들이 극장의 모든 창문과 출입문들을 열어 주니 신촌 주택가의 노란 가로등 불빛이 6월의 실바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나는 이번 생에 기타로 로망스를 연주할 수 있을까. 오늘부터 매일 10분씩 기타를 연습하는 계획을 세우려다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수첩에 적어 두었다는, 그래서 참 재미없는 사람이었다는, 공연 속에서 언급되는 어떤 선배가 떠올라 계획 따위는 하지 말아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이번 생에 로망스 정도는 연주해 보고 싶으니, 일단 기타 케이스를 벗기고 스케일이라도 더듬거려볼까. 매일 밤 흰 공책을 마주하다 어느 날 우다다다 글을 적어 내려갔을 작가처럼 이렇게 저렇게 기타를 더듬거리다가 어느 날 우다다다 로망스를 연주할 수 있게 되면 참 좋겠지만, 기대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고, 이제는 계획도 안 되고, 알 듯 말 듯, 고갈된 듯 여전한 듯 한 내 안의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사실 가만히들여다보기가 세상 제일 어렵고, 잠깐 들여다보기만 해도 성공이다. 그런다 해도 그 실체가 뭔지 도통 모르겠으니 그냥 어떤 기분, 느낌, 뉘앙스, 색깔, 공기, 냄새라도 알아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매일 밤 그렇게라도 너를 마주하다 보면 어느 날 우다다다 무엇인가 적어 내려가 듯 어딘가에 이를 수 있을까. 지난한 밤들 지나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드디어 올까.


포인트가 되는 부분만 연주하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연주하는 부분이 곡의 어느 부분인지 생각하면서 연습하세요. 그리고 아직 연주하지 않은 부분은 전체 곡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지도 이해해 보세요



*사진제공_신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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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김신록

 소개_연극하는 김신록입니다. 오늘부터 잘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