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08:06ㆍReview
- 조원석
- 조회수 779 / 2007.11.15
리뷰를 쓰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무엇을 쓸 것인가 고민한다. 의자가 점점 딱딱해진다. 결국 의자가 송곳으로 변하기 전에 내린 결론은 ‘쓸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없는 공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흐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조각은 있는데, 그 조각들을 이어주는 끈이 없다. 점을 따라 선을 그었을 때, 사슴이 되고, 호랑이가 되면 문제가 없는데,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사슴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끈이 없는 데, 끈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점(點)처럼 박혀있는 기억들. 그 점과 점들 사이에 상상이 만들어낸 믿음이 있다. 사진처럼 박혀있는 점보다, 더 생생한 동영상. 이 생생한 믿음은 과거로 갈수록 강해진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그림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뚜렷해지는 그림. 기억에 대한 시간의 경과는 모자이크에서는 거리로 나타난다. 그러나 <박물관의 초대>는 이러한 착각을 사전에 방지한다. 공연과 관객의 거리두기를 방지하고, 시간의 흐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점을 점으로 보고, 모자이크를 모자이크로 보라고 강요한다. 왜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조각 하나 하나마다 애정을 쏟아보다. 편의상 조각은 번호로 대체한다.
1) <DDISY 카페,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파티>와 <박물관의 초대>의 공통점.
<DDISY 카페>에서는 <죽음>과 <파티>가 같은 장소에 있다. <죽음>을 <슬픔>으로 보고, <파티>를 <기쁨>으로 본다면 슬픔과 기쁨이 한 장소에 있다. 한 장소에 있다고 해서 이 두 감정이 경계를 이루며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방식을 통해 기쁨 속에 슬픔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DDISY 카페>는 장례식이라는 형식을 띈다. 장례식에는 죽은 자와 어떤 식으로 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전혀 관계없는 관객들은 공연을 보는 행위를 통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즉, 장례식이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들은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연에 참여하게 되고,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개인>이 <우리>가 된다. 다시 말하면 사(私)와 공(公)의 구별이 없어진다.
<박물관의 초대>는 초대의 형식을 띈다. 초대는 私적인 사람에 대한 公적인 표현이다. 초대에는 친밀감과 격식이 아우러져있다. 격식으로 인해 친밀감이 더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해질 수가 있다. 왜냐하면 친밀감 속의 격식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공과 사가 서로 뒤 바뀌었을 때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존중을 해주고, 공적인 업무를 통해 만나는 사람이라도 애정을 갖고 대한다면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 필요 있을까?
<박물관>의 <초대>를 받았으니 박물관으로 들어가 보자. 박물관에는 유물이 있다. 이 유물들은 한 때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던 물건들이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유물이 이제는 역사의 흔적이 되고, 우리 모두의 과거가 되었다. <사유>가 <공유>가 된 것이고, <사>가 <공>이 된 것이다.
2) 왜 박물관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 만의 박물관을 소유하고 있다. 잘 열지 않는 서랍 속에, 먼지를 덮어 쓴 상자 속에,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물건들이 오히려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랍을 열고, 상자를 열다가 왈칵 쏟아지는 반가움을 한 번 쯤은 맛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반가움은 무엇일까? 과거의 물건이 과거에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일까? 아니다. 과거의 물건이 지금, 여기, 현재, 손으로 만져지고, 눈앞에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마치 현재,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처럼.
박물관에 있는 유물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있는 곳은, 현재의 시간이 흐르는 현재의 공간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박물관은 인간과 닮아있다. 과거의 흔적을 지닌 채 현재를 살아가고,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과거의 흔적들을 들춘다는 점에서 인간은 박물관의 유물과 닮아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초대해서 과거의 사진을 보여주고 옛 물건의 내력들을 들려주는 행위는 박물관의 사서와 같다.
인간은 박물관의 유물이고, 박물관의 사서다. 결국 박물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 박물관 사서는 박물관의 유물인 다른 배우들과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박물관의 유물들은 인간처럼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없어질)박물관의 초대>는 <(죽을) 인간의 초대> 인 것이다.
3) 왜 배우들의 움직임에 끊김이 있는가?
박물관의 유물은 점(點)이다. 이 점들을 보면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본다. 시간의 흐름은 유물보다 생생하다. 생생한 이유는 생명이 있었던 것들, 죽어있었던 것들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던 유물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불멸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생명이 있었던 것들은 죽었지만 생명이 없는 유물에 기생하여 지금까지 그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생명이 없는 불멸의 유물을 통해 이미 죽어 없어진 생명들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 유물이, 이 점(點)이 배우들의 움직임에서 끊김으로 나타나고, 생명의 흔적이 배우들의 움직임에서 이어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배우들이 대사를 하고 움직이는 것은 점(點)들이 만들어낸 허상이지만, 살아있는 것들의 흔적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이고, 점보다도 더 생생할 수 있는 것이다.
4) 왜 대사는 의미전달을 포기했는가?
대사는 언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깝다. 몸의 움직임이 끊어지듯 대사도 끊어진다. 아니, 오히려 간헐적으로 내뱉는 소리 때문에 몸의 멈춤이 더 뚜렷해진다. 소리의 시각화. 소리의 시각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사가 언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것은 언어의 목적인 의미 전달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의미 전달은 자막영상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이 영상이 박물관의 벽면을 따라 서서히 움직인다. 언어는 소리와 의미로 분리되고, 소리는 움직임을 통해 시각화 되듯이, 의미는 자막 영상의 문자로 시각화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사 처리는 기억을 떠올릴 때의 시각화와 닮아있다.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만일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장면이라고 하자. 소리가 들리는가? 아니라면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아니다. 뭔가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그런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장면은 기억 할 수 있지만, 음성은 기억할 수 없다. 단지 어수선한 장면과 함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친구들의 웃음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격렬한 움직임일수록 소리는 커진다. 소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소리의 시각화다. 박물관의 유물들이 내뱉는 대사는 바로 이러한 기억의 소리와 닮아있는 것이다.
5) 도대체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
불멸의 소녀는 죽음을 피하고자 불굴의 소녀를 가두고 살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굴의 소녀를 꺼내 준다. 하지만 불굴의 소녀는 자신도 죽는 다는 것을 알고, 불멸의 소녀였던 현재의 박물관 사서를 죽이고 현재를 다시 만들기 위해 과거로 가 자신의 미래가 될 박물관 사서를 다시 만난다. -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접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미래가 과거로 갔을 때의 과거는 미래인가? 아니면 과거인가? 반대로 과거의 박물관 사서가 미래의 자신을 죽인 불굴의 소녀를 만났다면, 그 순간은 현재인가? 아니면 자신의 미래인가? - 시간의 방향이 애매하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의 방향이 애매한 곳이 영화 속에만 있거나 인간의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골동품이 두 개가 있다고 하자. 하나는 10년 된 골동품이고, 하나는 20년 된 골동품이다. 어느 것이 더 낡았는가?(시간이 경과 할 수록 낡은 정도가 크다고 했을 때) 당연히 20년 된 골동품이다. 20년 된 골동품이 더 나이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 현재, 미래의 순으로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의 방향으로 본다면 20년된 골동품이 더 젊다고 할 수 있다. 10살 난 아이와 20살의 청년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박물관에서는 시간이 미래, 현재, 과거의 방향으로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아니, 미래라는 말은 빼야겠다. 박물관은 현재에서 과거로만 시간이 흐른다. 미래는 없이 과거만 길어지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데 과연, 이러한 시간의 흐름이 박물관에만 있는 것일까? 앞서 얘기 했듯이 <박물관>은 <인간>이다. 지금 현재를 보자. 그리고 잠시 미래를 그리자. 한 치 앞도 예상 할 수 없다. 미래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유일하게 단정 지울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나마 그 정확한 시각 역시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시간은? 현재와 과거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박물관처럼 과거만 늘어나는 현재 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라는 개념은 현재의 ‘나’가 과거를 떠올릴 때, 현재의 ‘나’로 인해 생긴 개념일 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미래 역시 과거에 있었던 죽은 자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즉 미래의 죽음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일 지도 모른다.
<(없어질)박물관의 초대> 속에 흐르는 시간의 방향은 박물관의 유물이 나이를 먹는 시간의 흐름을 따른 것이고,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에게도 해당 되는 것이다.
시간은 현재, 과거, 미래의 순으로 흐르며 이것은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미래를 확정 짓는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공룡을 믿듯이 우리의 죽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출발은 현재이다.
어느 덧,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점을 점으로 보고, 모자이크를 모자이크로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작품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를 멀리 두고 보지 말자, 가까이서, 현재 이곳에서 과거를 보는 것, 이것이 미래를 보는 방식이지 않을까? 순간, 순간을 잊지 않고, 흐름을 보는 것, 이것이 모자이크를 보는 방식이고, <박물관의 초대>가 보여 주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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