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9. 16:50ㆍReview
2014 Doosan ArtLAB 다원 <타토와 토>
사람의 가치는 위기 순간에 빛을 발한다
글_안태훈
현대 공연예술 시대에 소외된 배우들
연극이 다른 예술장르와 융합하기 시작하면서, 무대에는 거대한 기계장치들이 군림하기 시작했다. 배우를 위해 조직되던 무대공간이 점점 ‘배우 친화적’ 환경이길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와 퍼포머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이 시대에, 무대 위 배우 존재감은 현격하게 줄거나 단순한 오브제 성격으로 축소되고 있다. 배우의 입으로 드라마가 진행되고, 연출의 상상력이 배우의 움직임을 통해 형상화됨으로써 이야기가 생생하게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다.
텍스트를 섬기는 연극을 열심히 하던 배우들이 다원예술로 불리는 퍼포먼스로 자리를 옮길 때 봉착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내가 무대에서 뭘 해볼 수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출 혹은 아티스트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대에 올라야 하는 초라함과 광막함을 견딜 수 없다”는 토로가 그것이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처음엔 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얘기하지만, 결국 그것을 어쩔 수 받아들이고 삭이는 모습을 목격한다.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연에서 배우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참담하다. 장치들에 융화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오브제의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거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어떻게든 피력하기 위해 무대 장치들을 이기려 노력하는 모습, 둘 중 하나다. 프로덕션을 살펴보면, 당연히 연습실에서 아티스트와 배우 간 충돌을 중재해 주는 역할은 없었다. 갈등은 창조의 원천이라지만, 생산적이지 못한 반목은 오늘의 예술이 본령으로 여기는 융합과 혼종의 요구에 철저히 대치되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산아트센터 아트랩 <타토와 토>는 오늘의 다원예술제작환경에서 보기 드문 안정적 결과물이다. 예술실험을 지향하는 기획에 반하는 평이겠으나, 배우 성수연의 공을 차치할 수 없다. 그녀는 무대 장치 특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텍스트와 무대장치효과가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매개했다. 동시에 무대 위 어지러운 장치들 속에서 이야기 진행의 완급 조절을 수행하고, 관객의 눈과 귀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안내했다. 오늘날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퍼포머로서의 새로운 역할들을 존중하면서, 배우의 전통적 위상을 지켜낸 것이다.
이야기꾼의 전통적 역할을 나눠 갖는 테크놀로지 장치들
무대에는 시각적 효과들을 구현하기 위한 각종 장치들이 놓여 있고, 무대 중앙 뒤쪽에는 하얀색 장막이 쳐져 있다. 공연이 시작하면, 퍼포머 성수연은 무대에 나와 왼쪽 책상에 준비된 특수 카메라 장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속에서 그녀는 타토와 토의 역할과 이야기꾼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번갈아 입으며 극을 진행한다.
형제 타토와 토는 수평선 너머 빛을 찾아 배를 타고 떠난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다. 형제가 거주하는 네 개의 섬은 현재 거인에 의해 하루 종일 빛이 들지 않고, 해와 달 대신 거인의 두 눈이 지배하는 기이한 공간이다. 색과 소리가 사라진 섬에서, 두 형제는 각 섬을 돌아다니며 색과 소리에 대한 옛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는다. 바람, 돌, 풀의 촉감과 청각을 통해 각 물체의 모양과 색을 상상한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들은 거인의 눈에 화살을 쏘고, 섬에 빛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빛은 오로라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추억하게 한다.
이 플롯위에, 텍스트는 상징적 기표와 환상적 묘사로 이야기를 조직한다. 무대 곳곳에 설치된 시청각장치는 텍스트가 설정하는 네 개의 섬과 타토와 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공간이며, 타토와 토가 듣고, 느끼고 상상하는 이미지들을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장면은 무대 중앙 뒤쪽에 위치한 하얀색 장막에 프로젝션 되는데, 특수한 장치가 돼있는 카드(정사각형 모양의 종이)를 놓으면 카메라장치가 반응하여 스크린에 가상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타토와 토이기도 하고, 섬의 자연환경이기도 하며 부모님이 탄 배이거나 거인의 형상이다.
퍼포머는 무대 왼쪽-가운데-오른쪽 및 곳곳에 설치된 장치들을 옮겨가며 계속 이야기를 전개한다. 청각장치는 시각장치가 구현한 이미지를 풍성하게 만들며 극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한다. 혹은 무대 앞에서 퍼포머가 타토와 토의 역할을 입고 섬에 있는 다양한 보석조각들과 물체들을 만져보는 장면을 연기할 때, 그 촉각적 느낌을 청각적으로 구현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장면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 공연 구조는 이야기꾼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연극의 시원적 성격’에 기초한다. 다만 이야기를 사람이 듣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중간 연결지점에 기계 장치효과가 개입함으로써, 관객의 머릿속 이미지를 무대에 생생하게 구현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만드는 사람의 가치
하지만 이런 공연 구조에는 두 가지 치명적 위험성이 있다. 먼저 이야기꾼의 입과 물체 활용을 통해 창조되던 상상의 이미지가 첨단 기술들로 대체된다는 것은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하여 텍스트를 관객이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 즉 기계가 창조하는 이미지가 정말 새로운 그림이나 혁신적 기법이 아니라면, 관객은 상상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닌 창조한 이미지가 흥미로운지 아닌지 판단하는 자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청각적 환상성이 만드는 관객의 감탄은 장면이 반복될수록 무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객의 기대를 뛰어넘지 못하는 시퀀스가 연이어지면, 관객은 공연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눈이 무대가 아닌 손목시계를 향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무대 사고 위험성이 더욱 높아진다. 무대 위에 오르는 존재들은 모두 생명력을 얻기 때문에, 리허설 직전까지 잘 작동하던 기계 장치들 또한 공연도중 긴장한 나머지 작동하지 않거나 오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중심 연극에서는 배우들의 순간적 기질발휘를 통해 사고를 최소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타토와 토>같이 기계장치들이 무대에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복잡한 큐를 구성하는 공연들은 기계 결함이 치명적 오점으로 연결된다. 사고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아티스트들은 당연히 대비책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고, 이런 상황에서 퍼포머는 무대 위에 그대로 방치된다. 장치는 복구될지 모르겠으나, 끊어진 이야기 흐름과 관객의 집중력을 홀로 끌어올려야 하는 배우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다. 본인이 관람한 9월 3일(수) <타토와 토> 공연에서는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제가 명확히 드러났다.
그러나 성수연은 이 위기들을 자연스럽게 헤쳐 나갔다. 먼저 그녀는 기계장치들과 앙상블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관객이 무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망설일 수 있는 지점을 최소화 시킨것이다. 무대에 설치된 비디오 장치들을 가지고 놀되, 어느 부분에서 비디오 장치로 구현되는 장면을 보고, 어느 지점에서 그 장치들을 가지고 노는 퍼포머 자신의 모습에 주목해야할지 관객을 이끌었다. 장면이 끝날 때마다 서둘러 다음 장면으로 옮겨가는데 급급하지 않고, 차분한 연기 비즈니스를 구축하여 이야기 완급을 조절하고 관객이 시각적 피로를 덜 수 있도록 인도했다. 특히 타토와 토가 섬에 있는 광물들의 소리를 느끼며 사물의 질감을 상상할 때, 그녀는 물체의 특성을 담담한 어조로 설명하고 그 질감을 단순명료한 비즈니스로 구현함으로써 관객의 공감각적 상상력을 잘 일깨웠다.
<타토와 토>는 텍스트가 시·청각장치를 이끄는 구조다. 하지만 기계 효과가 적극적으로 유입되고 텍스트가 매우 상징적인 언어로 구성되다보니, 관객은 자칫 텍스트의 존재를 잊고 무대 효과 그 자체에 함몰되는 위기를 겪는다. 퍼포머의 이야기 전달 능력이 절실히 필요한 이 공연에서, 성수연은 차분하고 명료하며 자연스러운 화술로 관객이 공연 내내 텍스트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미지 상상의 원천인 텍스트의 지위를 공고히 만든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이런 능력은 위에서 언급한 사고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테크니컬 문제로 공연 후반부에 스태프가 무대에 개입하고, 급기야 공연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공연이 다시 시작되자 그녀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며 관객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끊어진 이야기 흐름을 조율하며 공연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도록 선도했다.
다원예술 작품제작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
배우에게 퍼포머 지위를 부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무대에 노출된 기계장치들의 이질감을 배우가 상쇄시키면서, 공연에 관객이 몰입과 이화(異化)를 번갈아가며 수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아티스트와 퍼포머는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무엇보다 퍼포머는 끊임없이 아티스트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장치의 특성과, 그것이 만들어낼 이미지들을 예상하고 확인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 표출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나 자신이 도드라지는 것이 곧 존재감 피력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들이 원하는 그림이 무엇인지 먼저 듣고, 우선 나를 그들에게 맞추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작업과 다르다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대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가져야할 사명감을 포기하는 행위다.
아티스트는 퍼포머가 무대에서 느낄 외로움을 보듬어야 한다. 일방향적 의미 전달 및·고착에 대한 저항이 다원예술의 궁극적 방향이라지만, 의미를 차연(差延)하는 것과 무대 위 각 기표들을 파편적으로 방치하는 것은 반드시 구별돼야 한다. 즉,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그것을 조율해야 하는 것이다. 연극이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배우가 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작업에 연극적 요소들을 융합시키려 한다면, 먼저 이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배우들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며, 무대 위 기표들과 관객을 연결시키는 허브의 역할을 자처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_두산아트센터
필자_안태훈 소개_오곡백과가 풍성해지듯, 좋은 연극도 풍성해지는 가을을 기다려 왔다. |
제작노트_<타토와 토>는 음악, 소설,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카입, 황정은, 이경화가 모여 만든 프로젝트 팀이다.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고 덧붙여 스케치를 만들어내고, 그 스케치를 자신의 작업에 다시 반영해 함께 작품을 완성한다. 글과 그림, 소리가 상호작용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시놉시스_이 짧은 이야기는 타토와 토의 하룻밤 기록이다. 매일 어두워지고 차가워지는 섬에 남은 형제, 타토와 토의 이야기이다. 형제는 먼 수평선의 빛과 소리를 쫓아 섬을 떠난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거인이 먹어버린 섬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밤을 보낸다. 형제가 지내는 동굴 바깥에는 재가 눈처럼 쌓여가고 섬은 더욱 더 어두워진다. 아티스트 정보
카입(kayip)_카입은 소리를 통하여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그려내는 것에 관심을 둔 작곡가로, 선율보다는 음향 자체의 질감과 색조에 주목하는 음악작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소리와 그것의 시각화를 통하여 기존의 공간을 재해석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황정은_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누구보다 개성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로 한국일보 문학상, 신동엽 문학상을 받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굵직한 문학상에 거론되며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팟캐스트 <2012문장의 소리> 〈작가의 방〉을 진행했으며, 2013년 3월 〈라디오 책다방〉 이라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경화_이경화는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로 2012년 레드튤립(Redtulip)을 런칭하여 특유의 일러스트와 이야기를 담은 Living object 혹은 Non object을 선보이고 있다. 유쾌한 이야기들을 삶을 통해 나누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작업을 이어간다. 제작스탭 정보
연출 카입(kayip,이우준) / 글 황정은 / 일러스트레이트 이경화 / 출연 성수연 / 무대디자인 김은진 조명디자인 고혁준 / 영상,애니메이션 서광은 / 인터렉티브 미디어 카입(kayip,이우준) 음향디자인 신지영, 카입(kayip,이우준) / 기획 정우초
*본 프로젝트는 전자출판, 애플리케이션 개발, 공연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될 예정이며, 작업에 대한 제안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tatontoe2@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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