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7. 15:37ㆍReview
끄트머리 리뷰
글_ 정은호
동물극이 서사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동물을 닮은 사람’에 대한 방식과 ‘사람을 닮은 동물’에 대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즉 동물의 행동양식을 자세히 표현해내는 데 힘을 쏟는 연극과, 동물의 사상 자체를 대사로 들어내는 데 힘을 쏟는 연극이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 둘은 분리되기 어렵지만, 둘 사이의 강약 조절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끄트머리’는 후자, 즉 동물들의 사상에 중점을 맞춘다. 이 연극에서 배우들은 대부분 회사원의 복장을 하고 있다. 즉 동물이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처럼 자본에 착취당한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연극이 동물 그 자체를 나타내기 보다는, 동물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속성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복장은 동물의 외형이라기보다는, 동물이 현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동물의 행동을 자세히 묘사해내어 관객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자본에 착취당하는 동물들의 삶을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극에서 등장하는 다섯 동물들은 모두 병들거나 마음에 상처가 있다. 광우병에 걸린 소, 구제역에 걸린 돼지, 조류독감에 걸린 닭, 항문이 헐어버린 고양이, 어미를 잃고 자란 뉴트리아가 그들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인간이고,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로 그들을 한없이 착취한다. 시스템에 의해서 노동을 반복하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동물들이 가지는 희망이란 어떤 것일까, 삶의 끄트머리까지 몰린 동물들이 추구하는 희망에 대해 그린 것이 바로 ‘끄트머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서 탈출한 다섯 동물들 중 유일하게 병들지 않은 뉴트리아는, 인간들에게 복수할 것을 꿈꾼다.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는 희망이란 확실히 존재하며, 그것을 이뤄나갈 수 있다는 신념에 차 있는 인물이다. 그와 반대되는 인물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등장한다. 그는, 인간에게 투쟁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행동인지 잘 알고 있고, 인간이란 저항 불가능한 거대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는 동물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 문제로 다툰다. 한쪽에서는 언제나 희망을 얘기하고, 한쪽에서는 절망을 얘기한다. 끄트머리에서 이들은 제각각 다른 생각을 품는다.
이런 이들에게 ‘열차’가 다가온다. 그들이 즐겁게 살 수 있는, 희망의 장소로 떠난다는 열차였다. 하지만 열차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으로 열차를 생각했지만, 그 열차는 도축업자가 탄 죽음의 열차였다. 열차가 희망을 품은 곳이라고 말한 것은 소였다. 그는 다른 모두를 속여 열차에 태웠다. 광우병에 걸린 그는 생각했다.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음만이 희망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는 모두가 죽도록 돕는 것이 결국 가장 큰 희망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돼지와 소는 인간에게 잡혀 들어가 열차 안에서 죽음을 맞는다. 극 중에서 ‘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뉴트리아는, 이런 소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그들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과 싸워나가는 것이 더 나은 삶의 형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열차를 탈출한 나머지 세 동물들은 다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너무 먼 것처럼 보인다. 끄트머리는 동물극의 형식을 빌려 희망에 대해 얘기하는 연극이다. 과연 이들은 이 잔인한 인간의 세계에서 희망의 끄트머리에는 닿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끄트머리’에서 그려내는 희망에 대한 사유에 조금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결국 연극은 관객에게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못한 채 끝이 나기 때문이다. 연극은, ‘동물을 착취하는 인간은 사악한 존재다. 그러므로 동물들에게 이 현실은 잔인하다.’라는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전체의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내가 기대했던 연극은, ‘사악한 인간들에게 착취당하는 동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는 희망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보여줄 수 있는 연극이었다. 정확한 답이 아니더라도, 절망 속에서 유쾌하게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동물들이 더 보여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오직 뉴트리아, ‘똘이’만이 그 역할을 가까스로 해내지만, 결국 그도 연극의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연극이 끝난다. 이 연극 이후의 서사가 존재한다면, 나는 ‘똘이’가 인간에게 복수를 성공하는 서사보다는,(그런 서사도 좋겠지만) 실패하고도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서사였으면 좋을 것 같다. 인간에게 핍박받는 동물들의 서사는,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현실 상황의 메시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연극만이 할 수 있는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나는 더 원했다. 그 점이 아쉬운 연극이었다.
희망이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끄트머리’라는 연극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소중한 단어다.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이런 얘기를 했다. ‘삶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라. 기대하지 않는 순간 슬퍼할 것도 실망할 일도 없다. 공짜를 바라지 말고, 우연히 다가오는 작은 도움과 행운들을 소중히 여겨라.’ 나는 이 태도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희망을 읽는다. 희망이 없는 상태 자체를 희망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 흔들리는 열차 속에서 죽어가는 동물들에게는 지금 생각해도 연민이 간다. 그들이 조금 더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끄트머리’는 동물들의 슬픔을 잘 보여주었다. 절망 속에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그들의 상태에 대해 확실히 인식시켜주었다. 희망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었고, 희망의 기준, 희망의 잣대, 그 잣대를 재는 잣대들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이 고민의 중심을 잡는 희망에 대한 태도다. 그 태도를 얻는 연극이었길 바랐다. ‘끄트머리’의 병든 동물들이, 인간들에게 착취당하며 수동적인 상태로 죽음을 맞지 않기를 바란다.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가치관대로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는 생각해본다. 희망을 꿈꿔본다..■
* 사진제공_서울프린지페스티벌
필자_정은호
소개_ 시를 공부하고 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으나 미래에도 계속 시를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끄트머리>는 죽어가는 동물들이 바라보는 인간 사회의 부도덕성과 부조리함을, 체념이라는 통념으로 잔잔하게 풀어 낸 작품이다. 또한 인간의 이기적인 자본의 탐욕에 대한 고민도 함께 했다. 잔잔함 속에서 들려오는 웃음.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의 따분함은 자유를 갈망하는 욕망과 주어진 운명의 한 숨이라는 체념을 들려준다. 당연하다는 듯이 숭고하게 받아들인 자신들의 삶에 죽음이 다가올 때, 딱 한 번. 온 마음으로, 온 힘으로, 체념을 저항으로 승화시켜 외치는 그들의 삶에 집중하고자 한다. 커피를 마실 때,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을 때, 통닭을 먹을 때, 한 번 쯤 이 연극이 생각나기를 기대한다.
줄거리
<끄트머리>는 체념하는 삶에 대한 잔잔한 이야기이다. 온전한 자유가 숨 쉬는 곳을 찾기 위해, 혹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길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의 모습이 형편없이 던져져 있다. 육골분(동물성) 사료를 먹다가 광우병으로 미쳐버린 소, 낙동강 괴물이 되어버린 뉴트리아, 똥 싸는 기계로 전락한 사향 고양이, 구덩이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돼지, 닭장에 갇혀 알만 낳던 암탉, 그리고 버려진 노숙자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직장인의 모습이 무대에 보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온전한 자유가 숨 쉬는 세상이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우리의 외침은 한낱 메아리로 사라질 테지만, 우리의 온기는 따스함으로 영원할 것이다.”
아티스트 소개
각 장르의 창조적, 해석적 이단아들로 구성된 개방극장은 오감이 충족되는 공연을 기본적으로 추구한다. 또한, 동시대를 반영하면서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연출, 다양한 장르를 통한 테마 변형의 능동적이고 유연한 공연임과 동시에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한 시선을 보여주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속 깊은 통찰을 시도한다.
출연진 & 제작진
출연진 : 이상철 길민영 이송현 임형섭 전소랑 길덕호
제작진 : 임형섭 김성현 장하민 이상철 박동조 길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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