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4. 02:19ㆍReview
감히 한 연극 올리니
<삼일로창고극장 봉헌예배>
쿵짝프로젝트
글_권혜린
<삼일로창고극장 봉헌예배>라니, 제목과 주보 형식의 티켓(이자 팸플릿)만 본다면 연극이 아니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희생제의’에서 시작하여 ‘축복기도’로 끝나는 11개의 예배 순서도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인다. (물론 전복적인 부제가 바로 옆에 있어 함께 읽어야 즐거울 것이다.) 그럴싸한 패러디는 다소 도발적이고 불온할 연극을 마주하게 될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공연 안내에서 ‘공연 중 혐오 발언이나 공연 방해 행동 시 즉각 퇴장 조치합니다.’라는 문구를 보았던 터라 ‘설마’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기우로 끝났다.
입장하면 벽에 “하나님이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가 적혀 있고, 붉은색과 초록색 옷이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다만 교회처럼 좌석이 일렬로 늘어서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관객석이 양쪽에 있고 가운데 공간과 계단에서 공연이 이루어진다. 함께 연극을 보는 관객들이 날것의 작품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는데 마주 보고 있어 표정이 잘 보였다. 좌석에는 공연 진행석도 있어 배우가 연기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배우와의 거리가 최대한 좁은 곳에서 거리감 없이 몰입하게 된다. 관객 역시 가만히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참여자가 되어 많은 구절을 따라 하고, 성찬식도 함께 한다. 구석에서는 예배를 수화로 통역하면서 예배의 소리도 볼 수 있다.
예배 순서가 11개나 되지만 작품 안에서는 순서가 따로 표시되거나 안내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분위기가 급변하다 보니 잘 따라가야 해서 집중력 있게 관람하게 되었다. 일관성 있는 서사가 있기보다는 분절되어 있는 옴니버스식 구성이 오히려 대사, 영상, 춤, 노래가 모두 다채롭게 들어가 있는 풍부한 형식들과 어울렸다.
이유 있는 불온함
제일 먼저 ‘1. 희생제의-거짓된 성전을 허물다’에서는 목사가 믿음을 가지라는 설교를 한다. 납득은 안 되지만 ‘아멘’을 외치게 하는 모습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다행히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는 믿음을 설파하는 ‘거짓된 성전’은 무너지고, 대신 ‘2. 경배와 찬양-드랙퀸의 축복송’을 통해 뮤지컬 무대가 펼쳐진다. ‘나는 나대로 아름다워’라는 레이디 가가의 가사와 함께 손으로 새 모양을 만드는 모습이 희생 제의 후 나타날 새로운 양상의 부활을 암시하는 듯하다.
목사와 드랙퀸이 관객석에 착석한 뒤, ‘3. 예배로의 부름’에서는 목소리가 등장하여 “빼앗긴 예배를 되찾기 위해 모였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나열되는데 아픈 자, 방황하는 자, 소외된 자, 이 악물고 사는 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생긴 대로 살고 싶은 자, 무기력하고 우울한 자, 여성주의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이지 못한 자, 성 소수자 등 목록이 흘러넘친다. 언뜻 구체적인 듯 보이나 사실은 매우 포괄적인 과잉의 목록들은 차별하는 자들의 예배를 거부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예배를 실현하려는 선언이다.
이후 이에 동참하는 관객들의 몸짓으로서 육우당의 「낙원가」 구절인 “어서오라 어서오라 평화로운 세상이여”라는 구절을 함께 읽게 된다. ‘동성애자가 보호받고, 장애인도 존중받고, 흑인 또한 사람 대접받는’ 낙원을 희구하는 것이다. 성찬식에서 ‘우리 곁의 예수’로 등장하는 육우당의 작품들은 곳곳에서 인용되는데 퀴어이자 퀴어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가였고 차별적인 세상과 기독교를 비판하였으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점에서 육우당의 존재와 작품은 <삼일로창고극장 봉헌예배> 전체와 닮아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저 참고 넘기기에는 차별적인 세상이 너무나도 이상하므로, 그것에 불온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역설적으로 온당한 태도가 되는 ‘이유 있는 불온함’에 해당한다.
틀린 근본이 아닌 다른 근본으로
‘4. 죄의 고백, 참회의 시간-한국 기독교 역사와 혐오의 계보’에서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판하며 한국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혐오의 계보를 이어 왔는지 읊는데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나 친미 보수 기독교 등 정치와 종교의 비정상적인 공모를 말하며 이들이 어떻게 반공주의라는 기치 아래 ‘빨갱이’를 사냥했는지,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동성애’를 사냥했는지 비판한다. 사냥이라는 말에서 혐오라는 감정이 잔뜩 묻어나온다. 이는 나아가 일상에서도 종종 목격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문구로 이어진다. 육우당의 「타락교회」에도 나오는 이 문구는 표면적으로는 믿음을 기준으로 천당/지옥을 나누는 것 같지만 기저에는 맹목적인 믿음 아래 기독교 아닌 자들을 차별하겠다는 혐오가 깃들어 있다.
나아가 ‘5. 막간극-박적박문적문’에서는 차별을 반대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노력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예되는지 비판한다. 쉽게 미루어지는 차별금지법 등의 제도적인 장치는 그 안에 고인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한 안일한 단어인 ‘나중’으로 드러난다. 고통은 현재 진행형인데 나중이라니, 차별 금지가 현재 긴급하다고 생각한 우선순위로 들어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미지수이다. ‘먼저’로서 긴급하게 제시된 사람 안에 퀴어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문구를 패러디한 것에서는 실소가 나왔으나 처절한 현실은 답답함을 준다.
그 뒤에 드디어 ‘6. 봉헌기도-삼일로창고극장을 바칩니다’로서 작품의 제목이 등장한다. 육우당의 「만민평등기원가」에 따라 가짜 평등 대신 만민 평등을 기도하고, 이어서 삼일로창고극장을 봉헌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된다. 명동성당, 영락교회, 2018 제주퀴어문화축제, 삼일로창고극장 등 여러 사진이 나오면서 제주 4·3 사건에 개입했던 서북청년단과 영락교회의 관계를 밝히기도 한다. 친미와 반공주의가 결합한 월남 기독교인들이 장로가 되어 정치에 개입하고, 그것을 ‘평정’이라는 자신감 있는 어조로 발화할 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참담함을 느낀다. 퀴어 축제를 방해하는 기독교 세력 또한 절망감을 주기는 마찬가지이다. 뿌리 깊은 혐오를 보아하니 그 근본을 의심하게 되고, 비뚤어진 열정을 산뜻한 열정으로 바꾸고 싶어진다.
그러니 그들의 틀린 근본에 반대하여 다른 근본을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를 위해 사이에 있는 건물인 삼일로창고극장이 봉헌된다. 예수를 통한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꿈’을 위해, 할렐루야를 외치는 음악과 함께 무지개를 배경으로 삼일로창고극장이 하늘로 천천히 올라간다.
봉헌 후에는 새로운 장이 시작된다. ‘7. 성극-퀴어 예수의 생애’에서는 다른 근본을 위해 퀴어 예수의 일대기를 재구성한다. 1장 ‘퀴어 예수의 탄생’에서는 퀴어 예수가 제국의 밥그릇에서 ‘근본 없이’ 탄생하여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고, 30살에 커밍아웃하여 광야로 쫓겨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그곳에서 신의 목소리가 시험에 들게 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안아 주라는 말에 따라 세상에 복귀한다. 2장 ‘퀴어 예수의 사랑’에서는 ‘신명 나게’ 사랑을 전파하고 다니는 퀴어 예수의 모습을 부각한다. 3장 ‘퀴어 예수의 투쟁’에서는 예수가 사랑한 사람들은 ‘오염되었다고 여겨진 이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영상이 오버랩되면서 예수의 사랑은 곧 착취하는 자들에 대한 투쟁임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4장 ‘퀴어 예수의 죽음’에서는 십자가를 진 예수가 ‘오늘날에도 죽어 가고 있다’라면서 죽음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되고 있음을 알린다. 이처럼 대안 서사와 일대기는 현실과 맞물려 설득력을 높인다.
함께, 함께, 함께
그다음에 죽어 가는 현실의 예수로서 육우당의 일생이 펼쳐진다. ‘8. 성찬식-우리 곁의 예수를 기념하라’에서는 육우당이 왜 유언장에서 “나라와 세상이 싫다”, “강자도 약자도 없는 천국에서 살고 싶다”라고 했는지 절절하게 느껴진다. ‘몰지각한 편견을 지닌 사회가 낭떠러지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는 홀로 죽어 가는 개인의 죽음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을 함께 기리기 위해 배우들이 와인과 무지개 쿠키를 관객들에게 나누어 준다. 유언장이 낭독되는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죽어 가는 자의 곁에 있는 죽음의 공동체가 나타난다. 함께 나누고, 건배하고, 마시는 과정을 통해 가슴이 먹먹해지는 성찬식이 끝난다.
이어지는 ‘9. 간증-커밍아웃, 앨라이 선언, 고해성사, 연대 표명의 시간’에서는 배우들이 한 명씩 나와 간증한다. ‘아베마리아’에서는 무의지적인 이미지로 억압되고, 예수를 낳은 뒤 필요가 사라져 성모로 박제된 마리아 대신 삶을 이어 갈 ‘우리 시대의 마리아들’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새롭게 하소서’에서는 몸이 시선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금기어로 여겨졌던 신체의 명칭을 발화하고, 감정 노동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편하게 다니는 것을 통해 불편한 세상에 불편함을 드러내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돌아온 탕자’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였던 자신이 어떻게 차별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야기하고,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에서는 ‘무성애자’로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생기자 말하고 글 쓰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랑에 빚진 자’에서는 학창 시절과 군대에서의 수난을 극복하고 사랑의 전도사가 된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는 특히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내용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진정성 있는 고백으로서의 간증을 실현한다.
간증 뒤에 이를 축복하듯 ‘10. 성가-사랑은 영원하다’가 이어진다. 다른 순서에서도 계단 위의 공간이 종종 사용되었지만, 성가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성스럽게 이루어진다. 마지막 순서인 ‘11. 축복기도’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함께 즐거워하고 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있으리라”라는 기도와 함께 이번에는 다 같이 다소 기쁘게 ‘아멘’을 외치는 것으로 끝난다.
짧은 시간 안에 11개의 순서를 숨 가쁘게 달렸다. ‘아멘’까지 함께 외친 뒤, 비록 종교는 없지만 약간은 성스러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왔다. ‘제의-예배-연극’이 맞물리는 순간들을 경험한 것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차별로 가득 찬 입장이 속되다고 여기는 퀴어를 성스러운 의식인 예배에 결합하자 흥미로운 연극이 나왔다. ‘성/속’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무화하는 것과 더불어 혐오와 차별의 역사 속에서 희생된 이들을 계승하는 시도들을 목격하자, 단순히 일방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깨어나는 움직임들이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팸플릿/티켓에 있는 “사랑하는 관객 여러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라는 문구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 문구의 일부를 뒤이어 나올 연극들에 되돌려 주고 싶다. 감히 이런 연극을 올리는 것은, 앞으로도 환영이라고. ■
*사진촬영_한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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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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