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미래 연극을 위한 하나의 지침서 <주석 연극>

 

미래 연극을 위한 하나의 지침서

 

<주석 연극> @신촌문화발전소

 

김민관

 

▲ 입장 시 나눠 준 <주석 연극> 핸드아웃 상의 순서

 

프롤로그: 연극과 책

 

▲ 제본공방 성서에서, 모두가 극장 바깥에서 원으로 모여 향 종이를 태우는 모습 *사진제공_신촌문화발전소 *촬영_박동명(이하 상동)

 

연극이란 무엇일까. 또는 책이란 무엇일까. 연극과 책의 선후 관계나 인과관계와 같은 차원에서 그 둘의 길항 작용을 탐문하는 대신에 서로에 의해 다시 쓰이는 연극과 책을 말하는 <주석 연극>은, 통상의 기준에서의 책이 아닌 연극과 또 연극이 아닌 책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그것은 그 둘의 각각의 기원의 정의가 아니라 그 둘이 하나의 기원을 향해 가는 미래의 시점을 상상케 한다.

 

사실 보통 연극에서의 말이 책의 글(말)과 상대적으로 다르다는 관념은 <주석 연극>에는 없다. 여기서는 연극-책 또는 책-연극이 쓰이거나 발화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대사로 이뤄진, 희곡을 기반으로 한 연극이란 개념에서 비켜서서, <주석 연극>이 말하는 ‘연극’을 다시 구성해야 할 것이다. 책과 극장은 어떤 것이 무한하게 담길 수 있다는 차원에서 하나의 빈 공간에 가깝다. 책과 극장은 글자와 문자가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 채워지는 또는 채울 수 있는 공간이며, 그로써 텅 빈,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은 사라진다. 동시에 읽고 볼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실제 객석을 관객 대신 채우는 건 수많은 책들로, 시작과 끝에서 관객들이 이를 들여다 볼 때 일종의 제목만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제목은 ‘연극과 책’에 대해 박찬신과 적극이 대화를 나누며 생겨난 그에 대한 수많은 알레고리 차원의 생각들이며, 책과 연극 사이에서 그 둘을 다시/새롭게/낯설게 정의하는 연극(으로서의 책)이거나 책(으로서의 연극)의 제목으로, 그것이 아직 펼쳐지지 않은 세계를 상정한다. 또는 그것을 채울 수 있음을 가정한다. 그 연극, 책 들은 적극과 박찬신이 이후 펼칠 책, 연극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언젠가 쓰일 수도 있거나 만들어질 수도 있는 어떤 책, 연극 들이다. 곧 미래로 분포되는 책, 연극의 제목들이다. 그 안에 무엇을 채울지 또 그것을 가지고 구현할지는 이를 선택한 관객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일종의 텅 빈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책과 극장을 채우는 건 안팎을 교차하는 무수한 대화들이다. 도슨트로 자신을 소개한 사회자 유혜영은 빙 둘러 앉은 모두로부터 나와 한 명씩 악수를 나눈다. 적어도 이 안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주체들이 하나의 신체에 묻는다. 관객석에 있던 박찬신과 적극이 극장 바깥으로 나가 주석의 위치를 자처하며 막이 오른다. (어쩌면 이 연극은 프롤로그와 엔딩이 수미상관이 되는 구조로, 연극과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곧 주석에 의해 그리고 관객에 의해 수행된다. 아마도 이후 바로 엔딩의 단락으로 가도 충분한 완성의 구조를 갖고, 전적으로 그 순서를 따라간 이 글 역시 그러하다.)

 

탈무드. 인쇄병

 

▲  탈무드. 인쇄병에서 ‘인쇄병 점찍기’ 퍼포먼스 중. 박소영 퍼포머가 포스터로 만 모자를 쓰고, OHP로 벽면에 투사된, 안상수 그래픽 디자이너의 논문인「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李箱 시에 대한 연구」 표지 위에 점을 찍고 있는 모습. 

 

‘주석’을 따른다면, 탈무드는 애초 책과 책이 아닌 것(연극)의 기준을 형성하며 만들어진 책이다. 논쟁 과정의 말들을 일부 기록하는 건 탈락할 것과 살아남을 것을 가르는 기준 역시 살아남지 못하는 말들과 함께 사라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스승이 있는 자의 말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안 선생(안상수)이 점을 찍는 행위(디자인)를 하는 게 그가 인쇄병(인쇄를 다루는 군대의 한 보직)이어서 그런가라는 말은 ‘탈무드. 인쇄병’의 주요한 명제가 되며, OHP로 벽면에 투사한 안상수가 쓴 시인 이상에 대한 논문 표지는 퍼포먼스의 요소이자 스크린이 된다. 

 

이상의 아버지가 인쇄소를 했던 경험에서 이상이 문학적 시인이 아니라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디자이너에 가깝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논문의 한 부분에서, 주석은 이상과 안상수를 스승과 제자로 묶는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의 선후 관계는 뒤집힌다. 스승(의 앎)이 있고 제자(의 무지)가 있어 전자에서 후자로 지식이 전달되는 게 아니라, 제자 스스로가 스승을 구성해 낸다. 제자 자신의 작업이 시작하는 기원에 스승이 자리한다. 마치 제자는 스승으로의 내재적 분화를 겪는다. 

 

주석에 따르면 모르는 걸 알려주는 게 아니라 무지 자체를 알게 하는 게 교육으로, 그 무지를 아는 이가 스승이라 한다. 논문 표지가 인쇄된 슬라이드 위에 점을 찍는 퍼포먼스상의 행위는 곧 스승(박찬신)에서 제자(박소영)로 넘어가는데, 스승의 자리를 제자가 점유하는 대신 다시 그 바깥에서 스승은 제자를 사진으로 포착하게 된다. 동시에 스승은 제자의 행위가 있기 전의 자리를 점유하게 된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의 거리는, 스승이 제자의 행위를 인준하고 바라보는 걸 가능하게 한다.

 

반복해서 읽는 포스터

 

▲ 반복해서 읽는 포스터 중 ‘읽을 수 없는 책’. 관객들이 하나의 커다란 종이 위에 자신들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평생 읽는 책, 또는 수없이 반복해서 읽는 책에 대한 답은 적극과 박찬신의 것이 각기 다르다. 적극의 그러한 책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자신의 사주팔자를 스스로가 읽(어 내)는 것을 말한다면(이는 동시에 펼칠 때마다 새로운 책, 곧 연극의 대본이기도 하다), 박찬신의 책은 한 번에 다 볼 수 없어 계속 다시 봐야 하는 대수(4의 배수)로 접힌 종이를 말한다. 현장에서 관객은 펼쳐진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이를 접고 재단해 만든 책에서 하나의 그림이 부분들로 떨어져 때로는 엇갈리게 마주보고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곧 온전한 책의 전체는 실제 책의 인쇄 프로세스를 겪은 이만이 알 수 있다. 

 

한편, 적극의 책, 명리(적극의 사주를 포함해 저마다의 사주들, 나아가 저마다의 책의 펼침으로 만드는 연극에 선행되는 희곡들)는 연극을 위한 것으로, 연극을 어떻게 만들지가 같이 설명된다. ‘블루보틀’과 ‘정신분석학’은 그에 대한 주석에 가깝다. 블루보틀의 한 사람을 위한 커피 내림과 대화가 한 사람에 걸맞은 아마도 미래의 연극을 은유한다면, 정신분석학의 변형되지 않고 출몰하는 기억인 트라우마를 가진 환자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상담가의 관계는 관객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명리라는 연극을 은유한 것이다. 이 둘은 일 대 일의 시간과 관계를 갖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여기서 상담가(연출가)는 환자(관객)의 트라우마(변하지 않는 원국)를 유동적 기억(운명[運命], 곧 움직일 수 있는 명)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상담가가 환자에게 직접 기억의 해석을 수여하는(숙명[宿命]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관계를 통해. 이는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무지를 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제자가 자신의 무지로부터 스승을 구성하는 관계와도 유사하다. 

 

제본공방 성서

 

▲ 제본공방 성서에서, 제본공방을 하는 윤성서가 제본을 하고 주석(적극, 박찬신)이 이름 붙인 책들이 무대 위의 관객 뒤로 빈 관객석에 펼쳐져 있는 모습.

 

‘제본공방 성서’라는 이름은 제본공방을 하는 윤성서가 실제 객석에 놓인 책을 모두 제본했음에서 온 것이다. 주석은 가장 오래 전 책과 가장 오래 될 나무를 이야기한다. 전자는 ‘문맹의 책’(모두가 책을 읽지는 못하나 그것을 누군가가 대신 읽어주었던 시기)이라면, 후자는 책(문명)으로 바뀐 나무를 말한다. 여기서 ‘성서’는 인류의 오래된 책의 대표적인 알레고리로서 이름에 중첩된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면, 그 신의 음성을 적어 놓은 것이 성서이므로.  

 

관객과 사회자 모두 극장 바깥으로 나와 주석과 재회한 후, 다시 모두 빙 둘러 선 채 라이터와 클립, 향 종이 하나씩을 돌려, 이를 받아 든 모두가 향 종이를 냄새 맡고 태운다. 이 가운데 향 종이에는 모두의 손이, 손에는 책의 냄새가 묻는다. 그렇게 책을 태워 그리고 완전히 글자들을 지워 가장 작은 자기만의 조명으로 연극을 만들고, ‘조명의 몫은 어둠을 만드는 일’이라는 한 조명 디자이너의 말을 건네 듣고, 관객은 어둠의 극장으로 들어간다. 

 

관객은 바깥으로 가서 주석을 맞을 때, 글자의 바깥이 주석의 안이 된다. 글자와 주석 모두 책에 속하듯 극장의 바깥은 또 다른 극장이다. 그리고 다시 들어서는 극장은 이전의 극장이 아닌 또 다른 극장이다. 원을 둘러 태우는 모두의 향 종이 한 장씩은 책의 죽음을 말한다. 동시에 연극의 탄생을. 

 

엔딩: 동굴벽화 AR

 

▲ 동굴벽화 AR에서 관객들이 자신의 책 한 권을 찾는 모습.

 

주석이 극장을 나갈 때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듯, 다시 주석이 극장에 관객과 함께 위치하며 연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어둠 속에서 관객 각자가 하나의 책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연극이 된다. 관객은 연극을 수행하며 관객을 지운다. 빛은 책을 그리고 스스로를 비춘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건 빛이 아니라 어둠이고 관객이 아니라 책일 것이다. 잠시, 극장에 함께 들어온 주석의 말을 듣는 동안, 점점 빛 하나하나씩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만, 어둠은 그럼에도 절대적이고 관객의 행위는 어둠에 빛을 뿌리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동시에 관객은 또 다른 관객을 각자의 빛으로 구분할 뿐 그걸 책으로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다시 말하자면, 적극과 박찬신이 연극을 구상하는 대신 정기적으로 계속 만나 구성한 대화(전단을 참조하면, “(2019년) 3월 19일부터 대략 매주 1회 4시간 내외의 대담 혹은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에서 떠오른 자신들의 생각 또는 영감 들의 단어 혹은 이름 들이 제목으로 붙은 빈 책들이다. 그 단어 혹은 이름 들은 적극과 박찬신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관객의 생각이 붙어 빈 공간에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책의 한 구절이 책의 맥락을 벗어나서 현재 독자의 맥락으로 새롭게 재구성되는 것처럼. 

 

관객은 휴대폰 불을 밝혀 낮의 책, 글자 들을 보던 것에서 어둠 속에서 책, 글자 들을 발견한다. 극장을 채우는 건 또한 빛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소명하는 빛.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또는 만들어나갈, 만들어질 것을 기대하는 한 권의 책을 들고 극장을 나선다.

 

P.S. 블루보틀형 명리 연극

 

▲ 반복해서 읽는 포스터 중 ‘정신분석학’. 적극이 스스로 관객을 자처하여 관객 한 명에게 자신의 명리를 직접 설명해주고 있는 모습.

 

<주석 연극>은 하나의 연극이 아닌 하나의 연극이 될 수 있는 연극의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또 마치 관객과의 대화처럼 바깥에 나간 주석이 무대에 둘러앉은 관객―그 중앙에는 마이크 몇 개가 놓여 있어 질문의 기회가 열려 있다―과 그중 기본적으로 하나의 마이크를 들고 질문하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점에서 그 연극의 전후가 열려 있고 동시에 엉켜 있는 연극에 대한 연극, 곧 메타-연극이다. 연극은 과거를 재현하는 대신 현재를 생산한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이탈리아어로 ‘어디로나 흐르는’)에서 흐르면서 둘러붙고 정착하는 그리하여 다시 흘러가는 연극을 해온 적극 연출이 명리라는 툴을 연극으로 가져온 것은, 그것이 조선 시절 민중의 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때 각자의 원국은 공동체 혹은 사회 공통의 희곡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여덟 글자의 형상을 읽고 움직이는 운명으로 구성하는 것, 그러니 스스로가 스승의 자리를 내부로부터 만드는 것은 곧 원국이라는 고정된 글자의 자신을 유동하는 흐름의 역동적 자아로 바꾸는 행위가 아닐까. 

 

‘블루보틀 연극’, 그리고 각자의 명리를 가지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연극은 다수를 위한 한 번의(한정된) 연극이 아닌 소수를 위한 수없는 연극이라 하겠다. 블루보틀과 같은 일 대 일의 시간, 관객 스스로의 이야기(운명)를 펼쳐내는 방식, 관객이 배우가 되며 연출가가 관객이자 배우가 되는 상황. 이후 적극의 명리 연극은 어디로 흐르게 될까.

필자_김민관 소개_아트신(artscene.co.kr)편집장.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아카이브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고자 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중이다. 한편으로 예술(계)이 더 좋아질 수 있는 환경과 이를 위한 개인적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다.

매체실험퍼포먼스 <주석연극>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극, 흘러가는 말의 그림자인 책, 연극과 책이라는 두 매체를 연결하며 경계에 주목하다." - 연출가_적극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연출가. 장르 이전의 연극을 통과하여 지금 이곳의 연극이 되기를 지향한다.   그래픽디자이너_박찬식 타이포그래피와 도구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한 작업을 전시와 상업프로젝트를 통해 실천하고 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래피배곳의 더배곳 기둥스승으로 재직 중이다. - [일시] 06.27(목) 19:30 06.28(금) 19:30 06.29(토) 15:00,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