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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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9월 레터] 거리와 예술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
2012.09.10 -
[인디언밥 8월 레터] 축제 2
축제 2 - 지역성 생각해보면 축제의 이름 앞에는 대개 지역명이 붙습니다. 가끔 ‘젊은’ 류의 모호한 정체성이나 ‘변방’ 같은 추상적 공간이 수식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방곡곡 지역의 이름들은 보통 ‘공간’이 아닌 ‘장소’의 의미를 담지한 채 축제 앞에 붙여집니다. 그리고 장소라는 것은 공간과 달리, 고유하고 특수한 역사나 자연, 풍광, 기후, 그리고 사람들과 연관한 개념이지요. 그러므로 장소로서의 지명을 축제 앞에 붙이는 것은 그 축제를 단지 허공중에서나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그 곳이어야만 하는 곳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무언가로 환원시키는, 사뭇 위대한 작명법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찾아, 그 장소의 의미를 찾아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물..
2012.08.01 -
[인디언밥 7월 레터] 축제 1
축제 1 - 축제의 축제성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바흐친에 따르면, 중세나 르네상스의 카니발은 엄숙한 지배 문화를 유쾌하게 희화화하여 전복적인 파괴 및 창조적인 생성 양자를 풍성하게 발생시켰던 민중들의 축제였습니다. 애초에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제 역시, 풍요로운 수확을 기리며 자유와 도취에 열광하던 농부들의 축제였고요. 생명력, 피, 포도주, 정액 등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는 누구보다 그들 민중에, 땅에 가까운 신이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여인들은 산 제물을 갈기갈기 잘라 날로 먹는 행위를 통해 신과의 합일을 꾀하고 오랜 억압과 금기로부터 해방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원형인 디티람보스는 희생 제물을 바치는 순간, 집단적인 엑스터시를 강화하기 위해 추는 윤무였고요. 헌데 그랬던 축제는 기..
2012.07.06 -
[인디언밥 6월 레터] 야구와 연극
야구와 연극 가령 이런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경기의 흐름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순간, 타자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어깨 너머 배트로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수비수들과 주자들은 두 다리 가득 무게를 실어 다음 순간의 재빠른 동작을 준비하며, 마침내 공기 중에 팽배한 에너지를 끌어올려, 이어지는 투수의 와인드업. 뜨거운 한낮의 태양 아래서나 짙게 드리운 석양 아래서 또는 눈부신 밤의 조명 아래서, 관중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며, 또 누군가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장면. 그 몸들의 긴장, 숨 막히게 아름다운 한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이 매일 저녁마다 끝없이 되풀이된다는 사실. 그런데 또 여기에 더해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그 순간 갑자기 포수와 타자가 벌떡 일어나 장비들을 던지고 함께 탱고를..
2012.06.10 -
[인디언밥 5월 레터] 마음의 가난
마음의 가난 버거운 시기입니다. 모두들 가난합니다. 하물며 예술가들이야. 사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가난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 천재론을 능가하는 예술가 가난론이 등장해야 할 판입니다. ‘예술가란 신비적 직관이나 영감에 의존하는 천재’라는 믿음보다 ‘예술가는 가난한 사람’이란 가설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가난은 늘 예술가들의 화두였습니다. 가난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난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난을 불평하거나 가난으로 무장하여 그것을 도구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또는 자신의 가난에 대해 각종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가난하다고. 그리고 가끔은 그 말들이 가난보다 넘쳐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난하다는 건..
2012.05.06 -
[인디언밥 4월 레터] 청춘(靑春)에게 보내는 시(時)
청춘(靑春)에게 보내는 시(時) 김광석은 내가 5집을 미친 듯이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에 그만 죽어버렸다. 그해에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학업 성적이 우스웠으므로 취직 따위는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청춘이 끝나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우겨야 할 참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그해 겨울에 나는 김광석이 다음 앨범에서는 모던 포크로 완전히 복귀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떠들었을까? 내 젊음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빼고 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침묵만 남을 테니까. 그런 김광석이, 술에 취해서, 그것도 집에서 목을 맸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울어버렸다. 외로운 그 어느 집 한쪽 구석에서 내 청춘도 그렇게 목을 맨 듯한 느낌이었다. (김연수, 中에서) 그리고 작가는 이어..
2012.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