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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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3월 레터] 봄, 그리고 seeing
봄, 그리고 seeing 계절이 하나 지나고, 새로운 계절이 왔습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아직 공기에는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지만, 어김없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와 새순 돋은 나무의 연두 빛과 신입생들의 들뜬 얼굴 표정인 것 같습니다. 역시 어리고 예쁜 것들이 마음을 흔드나 봅니다. 예전에 읽었던 에드먼드 버크의 가 생각납니다. 버크도 역시 작은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대하고 큰 것은 숭고한 것이라고 했구요. 당시 ‘책이 생각보다 쉽다'는 기쁨과 ‘나의 감식안이 18세기 사람인 버크의 감식안과 별반 차이가 없구나’라는 자괴감이 동시에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도대체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현대예..
2013.03.20 -
[인디언밥 2월 레터] 동네 이야기
동네 이야기 2월이 지나면 제가 30년 넘게 살던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지 정확히 3년 반이 됩니다. 이 시간 동안 제 주위에는 예전과 다른 부류의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직장인 아니면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친구들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예술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연극인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시 희곡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극을 전공해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고 있는 일의 지평선을 더 넓히는 것 정도로 여겼으니까요. 3년 반의 시간이 흐른 지금, 노는 동네의 판이 더 커질 것이라는 처음 기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 더 커진 세상이 아닌 완전히 다른 동네, 다른 세상인 대학로에 있을 뿐입니다. 대학로에는 동시에 여러 연극들이 올라갑니다. 혜화동 일번지 5기 ..
2013.02.16 -
[인디언밥 1월 레터] 추위, 六寒一溫
추위, 六寒一溫 이번 겨울은 제 안에 쌓여 있는 서른 네 번의 겨울 중에서 가장 추운 겨울입니다. 20대와 40대의 차이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과 예측 가능한 인생의 차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사이에 있는 저의 시간도 여러 기억들이 하나하나 쌓이다보니 어떤 흔적 같은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을 따라가 보면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일지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혜안이 생긴다는 예쁜 말로 일단은 포장해 놓기로 하지요. 하지만 예측 가능한 인생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날씨’라는 복병이 숨어있습니다. 특히 ‘추위’입니다. 지구의 역습-온난화는 이 고요한 여정에 큰 돌을 던져놓고 있습니다. 온난화는 역설적이게도 추운 겨울을 몰고 왔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높아져..
2013.01.16 -
[인디언밥 12월 레터] 좋은 예술
좋은 예술 언젠가 좋다, 와 좋아하다, 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에세이를 쓸 일이 있었습니다. 가치판단의 세 측면인 객관주의, 주관주의, 객관적 상대주의 개념들과 이를 연관시켜야 하는 과제였지요. 어렵사리 기억을 더듬어 설명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흔히 알 듯 아름답다, 라는 말은 사실판단이 아닌 가치판단에 해당하지요. 그리고 이때 가치는, 절대적인 사실과는 달리, 어디에 방점이 찍히느냐에 따라 그 빛깔을 달리 합니다. 예컨대 세계나 대상 및 작품에 방점이 찍힐 수도 있고(객관주의), 지각하는 인간 주체가 주목될 수도(주관주의), 둘 사이의 관계 자체가 부상할 수도(객관적 상대주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대상 안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하는 객관주의와, 아름다움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2012.12.07 -
[인디언밥 11월 레터] 예술가의 목소리
예술가의 목소리 엄마 아빠는 저의 첫 울음소리를 녹음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미처 녹음기를 챙기지 못했던 어느 여행길에 산통이 시작된 바람에 제가 세상에 나던 첫 순간은 기록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이후에 옹알이를 하던 것, 또는 처음 말을 시작하던 무렵의 목소리 등은 아직도 몇 개의 테이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들어보면 제 옹알이 소리보다 훨씬 크게 저의 귓가를 울리는 것은 옹알대는 저를 어르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 그 목소리는 저의 세계였습니다. 티끌 한 점 없는, 한이 없는 사랑과 이해의 속삭임 속에 저는 있었습니다. 테이프가 늘어난 탓에 목소리는 변질되었지만 저는 그것이 ‘엄마’임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목소리란 그 사람의 존재이며, 존재했음의 ..
2012.11.15 -
[인디언밥 10월 레터] 예술가의 육체
예술가의 육체 눈 수술을 했습니다. 저 좋자고, 잘 보이자고 한 다분히 사치스런 수술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눈이 나쁜 것도 몸이 아픈 것이니 얼마만큼은 아픈 소리를 내봐도 되겠는지요. 실제로 각막이 덜 붙었다 벗겨져내려 생고생을 하기도 했고, 시력이 한참 덜 회복된 채로 컴퓨터를 붙들고 작업을 해야 했던 것도 모자라, 매일 밤 극장에 가서 자막 오퍼를 겸해야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덕분에 몸소 체득한 사실이 있었지요. 눈이 아프고, 앞이 잘 안 보이고, 심지어 자막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 관객이 한 명도 없을지라도 매일 밤 예술을 보조하는 지극히 미미한 임무를 제가 기꺼이 감당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날마다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내어주며 살아가고, 또는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실제로 극장의 조명 기술..
2012.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