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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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1월 레터] 추위, 六寒一溫
추위, 六寒一溫 이번 겨울은 제 안에 쌓여 있는 서른 네 번의 겨울 중에서 가장 추운 겨울입니다. 20대와 40대의 차이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과 예측 가능한 인생의 차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사이에 있는 저의 시간도 여러 기억들이 하나하나 쌓이다보니 어떤 흔적 같은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을 따라가 보면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일지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혜안이 생긴다는 예쁜 말로 일단은 포장해 놓기로 하지요. 하지만 예측 가능한 인생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날씨’라는 복병이 숨어있습니다. 특히 ‘추위’입니다. 지구의 역습-온난화는 이 고요한 여정에 큰 돌을 던져놓고 있습니다. 온난화는 역설적이게도 추운 겨울을 몰고 왔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높아져..
2013.01.16 -
[인디언밥 12월 레터] 좋은 예술
좋은 예술 언젠가 좋다, 와 좋아하다, 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에세이를 쓸 일이 있었습니다. 가치판단의 세 측면인 객관주의, 주관주의, 객관적 상대주의 개념들과 이를 연관시켜야 하는 과제였지요. 어렵사리 기억을 더듬어 설명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흔히 알 듯 아름답다, 라는 말은 사실판단이 아닌 가치판단에 해당하지요. 그리고 이때 가치는, 절대적인 사실과는 달리, 어디에 방점이 찍히느냐에 따라 그 빛깔을 달리 합니다. 예컨대 세계나 대상 및 작품에 방점이 찍힐 수도 있고(객관주의), 지각하는 인간 주체가 주목될 수도(주관주의), 둘 사이의 관계 자체가 부상할 수도(객관적 상대주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대상 안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하는 객관주의와, 아름다움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2012.12.07 -
[인디언밥 11월 레터] 예술가의 목소리
예술가의 목소리 엄마 아빠는 저의 첫 울음소리를 녹음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미처 녹음기를 챙기지 못했던 어느 여행길에 산통이 시작된 바람에 제가 세상에 나던 첫 순간은 기록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이후에 옹알이를 하던 것, 또는 처음 말을 시작하던 무렵의 목소리 등은 아직도 몇 개의 테이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들어보면 제 옹알이 소리보다 훨씬 크게 저의 귓가를 울리는 것은 옹알대는 저를 어르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 그 목소리는 저의 세계였습니다. 티끌 한 점 없는, 한이 없는 사랑과 이해의 속삭임 속에 저는 있었습니다. 테이프가 늘어난 탓에 목소리는 변질되었지만 저는 그것이 ‘엄마’임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목소리란 그 사람의 존재이며, 존재했음의 ..
2012.11.15 -
[인디언밥 10월 레터] 예술가의 육체
예술가의 육체 눈 수술을 했습니다. 저 좋자고, 잘 보이자고 한 다분히 사치스런 수술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눈이 나쁜 것도 몸이 아픈 것이니 얼마만큼은 아픈 소리를 내봐도 되겠는지요. 실제로 각막이 덜 붙었다 벗겨져내려 생고생을 하기도 했고, 시력이 한참 덜 회복된 채로 컴퓨터를 붙들고 작업을 해야 했던 것도 모자라, 매일 밤 극장에 가서 자막 오퍼를 겸해야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덕분에 몸소 체득한 사실이 있었지요. 눈이 아프고, 앞이 잘 안 보이고, 심지어 자막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 관객이 한 명도 없을지라도 매일 밤 예술을 보조하는 지극히 미미한 임무를 제가 기꺼이 감당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날마다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내어주며 살아가고, 또는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실제로 극장의 조명 기술..
2012.10.16 -
[인디언밥 9월 레터] 거리와 예술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
2012.09.10 -
[인디언밥 8월 레터] 축제 2
축제 2 - 지역성 생각해보면 축제의 이름 앞에는 대개 지역명이 붙습니다. 가끔 ‘젊은’ 류의 모호한 정체성이나 ‘변방’ 같은 추상적 공간이 수식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방곡곡 지역의 이름들은 보통 ‘공간’이 아닌 ‘장소’의 의미를 담지한 채 축제 앞에 붙여집니다. 그리고 장소라는 것은 공간과 달리, 고유하고 특수한 역사나 자연, 풍광, 기후, 그리고 사람들과 연관한 개념이지요. 그러므로 장소로서의 지명을 축제 앞에 붙이는 것은 그 축제를 단지 허공중에서나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그 곳이어야만 하는 곳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무언가로 환원시키는, 사뭇 위대한 작명법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찾아, 그 장소의 의미를 찾아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물..
201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