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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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6월 레터] 준비하는 사람
준비하는 사람 5월 11일부터 6월 11일까지 시청각에서 열린 김동희 작가의 전시 의 지킴이를 했습니다. 전시를 관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는 아주 간단하고 거칠게 말하자면 시청각이라는 공간 위에 새 틀을 씌운 형태의 전시입니다. 원래 있던 마루와 샷시, 계단과 옥상을 치우거나 그 위로 새것을 덮고 기존의 공간을 증축하거나 탈바꿈하거나 그 성질을 극대화하면서, 장소와 관계 특정성에 의한 의미와 감흥, 경험과 선험을 바탕으로 한 판단력, 몸의 근육과 감각의 요모조모를 불러냅니다. 그러기 위해서 희게 페인트칠된 목조 바닥과 가벽, 계단이 사용되었고 저는 그것들을 매일 청소하면서 한 달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번 편지는, 청소 일기입니다. 전시장의 문을 열기 전 조금 일찍 도착해 청소를 합니다. 어떤 날은 정..
2017.06.21 -
[인디언밥 5월 레터] 지갑 없이 걷기
지갑 없이 걷기 5월의 시작은 상하이에서 맞이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노동절은 큰 국경절 중 하나여서 노동절을 가운데로 3일 간의 휴일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더 오래 쉬었던 것이 줄어든 것인데, 여전히 학교 등에선 재량껏 일주일을 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메이데이 자체가 재량휴일인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이날 생각보다 많이 일하러 갔습니다. 노동절은 황금연휴의 ‘운 좋으면 옵션으로 쉬는’ 정도의 날이었던 것이지 그 자체로 황금연휴의 일원이 되기엔 부족한 까만날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람들이 휴가 때마다 그게 집에서 쉬는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럴 만한 시간이 평소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겠지요. 여행을 가기 전 여행책도 보고, 인터넷 ..
2017.05.16 -
[인디언밥 4월 레터] 4월을 봄
4월을 봄 4월을 목전에 두고부터, 이 달이 또 왔구나 생각했고, 올해도 4월은 이만큼의 어려움과 무게를 꼭 지니고 있구나 되뇌었습니다. 세상은 새로운 것을 바삐 준비하면서 기대감을 안기는 한편 필연적인 불안을 피워냈고, 저는 종종 이 순간 가져야 할 감정이 어떤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고는 했습니다. -4월이 되기 직전에는 ‘두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포럼에 다녀왔습니다. 신인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 다섯 명이 ‘두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라는 큰 주제를 각자의 세부 주제를 통해 풀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돈도 시간도 없는 청년 노동자이자 다큐멘터리스트가 영화를 찍는다는 것, 아이를 키우며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한다는 것, 젊은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의 사적 다큐멘터..
2017.04.20 -
[인디언밥 3월 레터] 지속하면서 살기
지속하면서 살기 -최근 몇 달간 말과 글에 대한 몇 개의 짧은 글을 읽었어요. 첫번째는 번역기의 기능에 대한 것으로, 한글로 ‘띵작’을 입력하면 ‘rnasterpiece’라는 답을 줄 정도로 그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과 정확성이 높아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선 ‘번역기가 발달했다고 해서 통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직업을 잃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 요지의 글을 봤습니다. 세 번째론 힐러리 클린턴이 영부인 역할을 수행하던 때 백악관 비서실장이 그를 두고 “문단으로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문장들이 아니라 하나의 문단으로”라고 말했다는 글을 읽었고, 마지막으론 어떤 웹소설 플랫폼에서 대사 옆에 캐릭터 일러스트를 삽..
2017.03.13 -
[인디언밥 2월 레터] n년 전 오늘
▲레이몬드 브릭스의 중 한 페이지 n년 전 오늘 사는 것이 얼마나 불만투성이면서 속시원한 것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페이스북의 ‘내 추억 보기’의 ‘2년 전 오늘’에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칼럼을 보고 또 그랬습니다. 2년 전 2월 이 글이 화제가 되었을 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페미니즘을 두고 찬반과 논란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무겁고 처지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 더 잘 말할 수 있고 잘 화낼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상냥해지려고 하지 않고, 언짢음 불쾌함 하나도안웃김을 숨기지 않고, 거절하고, 동의하지 않고. 이 당연한 걸 그동안 하지 못하거나 주저하면서 했다는 것을 신기해하고. ..
2017.02.14 -
[인디언밥 1월 레터] 이렇게 또 새해 편지
▲GUERRILLA GIRLS, 무제(FOR MESSAGES TO THE PUBLIC), 1990 COURTESY: JANE DICKSON (PUBLICARTFUND.ORG(사진캡션) 이렇게 또 새해 편지 1 새해라고 비장해지고 싶지는 않지만, 새해니까 다른 때엔 할 수 없는 다짐만만한 소리를 하고 싶기도 하고, 어영부영 우물쭈물하다가 1월 1일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2016년 하반기는 말 그대로 쏜살처럼 지나가서 결산도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달력을 갈아치우는 것만으로 기념할 수 있었습니다. 12월 31일에 종소리를 들으려 켠 TV에서는 분할화면에 숫자 카운트다운을 띄워준 뒤 열두 시가 넘자마자 쇼를 재개했습니다. 새해란 건 이렇게 얼렁뚱땅 와도 되는 거구나 생각했고, 곧장 이어진 S.E.S. 무..
2017.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