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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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2월 레터] 같이
늦은 2월 편지_같이 이번 달 편지를 시작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떤 말을 할 것인지는 마음을 정했지만 어떻게 말할 것인지는 쉽사리 정할 수 없었습니다. 몇 문장을 적어보다가 지우고, 차창 밖을 들여다보면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에 긴 숨을 내쉬기도 하고, 속에서 천불이 나서 몇 시간이고 찬바람을 맞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화가 난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고만 할 수가 없는, 훨씬 더 크고 많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체념하지 않았지만 허탈한 순간도 있었고 그럼에도 멈추고 싶지 않아 숨을 고르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2016년 ‘00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미술계, 영화계와 문단, 오타쿠 커뮤니티 등 여러 분야 내의 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올해 1월 페이스북을 통한 서지현 검사의 법조계 내 성폭력을..
2018.03.06 -
[인디언밥 1월 레터] 걷다가 머리를 툭
걷다가 머리를 툭 일주일 동안 타이베이에 갔습니다. 타이베이에 가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처음 갔을 때는 학과 답사였기 때문에 시내버스도 지하철도 타본 적이 없고 전세버스에 실려 미술관에서 박물관으로 또 다른 건축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재미있고 참 좋았지만은 도시의 어디에 무어가 붙었는지, 말하자면 지형도를 그리기란 어려웠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 그저 용감해서 친구들이 가보라고 한 곳에 모조리 가야겠다는 단 하나의 영문 모를 목표를 잡고 전해들은 곳들을 모조리 ‘갈 곳’ 리스트에 적어 넣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가겠다고 마음먹은 곳에 모두 갔고, 뜻밖의 부분들이 기억하고 싶은 일을 만들었습니다. 별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식물원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한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
2018.02.02 -
[인디언밥 12월 레터] 결산의 달
결산의 달 눈 깜짝할 새 12월이 됐습니다. 쏜살같다, 눈 깜짝할 새, 세월이 유수처럼, 같은 비유가 얼마나 적확한지를 새삼 느낍니다. 하루하루는 긴 것만 같은데 일주일은 금방이고, 그렇게 쌓인 한 주 한 주가 한 달을 채우는 것 또한 순식간인 것만 같습니다. 12월이 되었음을 처음 체감한 것은 '00결산' 글이 속속 올라오는 것을 보고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좋아했던 것이며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니 휘뚜루마뚜루 찾아오기야 했어도 연말은 연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 딱히 보고 들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과연 저 스스로는 무슨 결산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들기도 하고요. 월초부터 '결산'의 일환을 학교 안 극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졸업공연이며 기말발표가 속..
2017.12.27 -
[인디언밥 11월 레터] 머리를 맞대고
머리를 맞대고 11월 상하이에서는 기후변화연극제Climate Change Theater Action Festival가 열렸습니다. 전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이 축제는 ‘기후변화연극운동’의 일환으로, 각국 각지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열린다고 합니다. 기후변화연극운동 허브에 모인 희곡을 지역의 연출 및 배우가 공연으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해당 지역의 활동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면서 지역과 지역 사이 교집합과 여집합을 가진, 커다란 합집합으로서의 국제 축제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상하이 기후변화연극제는 관광지로 익숙한 티엔즈팡의 우슈 도장을 활용한 극장 씨어터 인 티엔즈팡Theatre in Tianzifang에서 이틀간 5-6분 남짓의 공연을 릴레이로 진행하는 방식으로 꾸려졌습니다. ..
2017.11.23 -
[인디언밥 10월 레터]목소리가 들려
목소리가 들려 9월 상하이에서는 퀴어필름페스티벌이 열렸습니다. 저는 두 섹션을 관람했습니다. 한 번은 단편상영이었고 한 번은 장편상영이었는데, 단편은 영국문화원에서 상영됐고 장편은 레즈비언 바 ROXY에서 상영했습니다. 원래 단편 상영은 영국문화원이 아니라 더 전문적인 상영관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는데, 검열을 이유로 해당 공간에서의 상영이 취소되어 급히 장소를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국가에서 온 여러 장르의 단편이 각자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를 외치고 속삭였습니다. 여러 편이 좋았지만 그중 캐나다로 이주한 아랍 성소수자 난민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들은 성매매와 성폭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집안의 수치로 여겨지고 내쫓기기도 한다고 합니다. 캐나다에서..
2017.10.31 -
[인디언밥 9월 레터] 다른 데서 본 공연
다른 데서 본 공연 8월 말부터 잠시 저의 거처는 상하이가 되었습니다. 편의점 도시락과 포장해다 먹는 2위안—340원—짜리 찐빵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과 사이사이로 공연을 많이 보았습니다. 바쁜 일을 제쳐두고 ‘편지에 적어야지’ 같은 변명을 혼잣말로 되뇌면서요. 첫 번째로 본 것은 한국과 동일한 프로덕션이 참여한 뮤지컬 였습니다. 공연이 열린 곳은 같이 간 친구들과 '아무리 여기가 뭐든 크고 번쩍이는 인민광장이라지만 이 건물은 그야말로 불시착한 UFO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상하이대극장이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뮤지컬 스타가 캐스팅되었고 몇몇 팬들이 아이돌 콘서트장에서 착용하는 것과 같은, 불이 들어오는 머리띠를 착용하고 인증샷을 찍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서 인상적이었던 ..
2017.09.30